[오늘과 내일/육정수]21세기의 고문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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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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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만 해도 수사기관 중에 고문(拷問)을 안 하는 곳이 없었다.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 전신)와 국군보안사령부(기무사 전신) 검찰 경찰이 모두 그랬다. ‘남산’ ‘서빙고’ ‘남영동’ 같은 동네 이름이 이들 기관의 고문 장소를 지칭했다. 20∼30년 세월이 흐르면서 이곳들은 모두 다른 시설로 바뀌었다.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지만 한때는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검찰의 고문 장소로 악명을 떨쳤던 곳은 ‘15층’으로 불렸다. 현재 서울시청 별관으로 쓰이는 덕수궁 옆의 옛 검찰청사 건물 15층에 대검 특별수사부(1981년 이후 대검 중앙수사부)의 특별조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손님’(피의자)이 없는 날은 육중한 철제 출입문에 큰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고, 조사 중일 때는 안으로 잠겨 있었다.

20∼30년 전엔 고문 전성시대

검사들은 피의자가 순순히 자백하지 않을 경우 “15층으로 갈래, 아니면 여기서 불래”라고 위협하곤 했다. 대개는 수사관들에게 ‘작업’을 맡겼다. 검찰에 자주 들락거린 피의자들은 15층 얘기만 나오면 자지러졌다. 재판 과정에서 고문으로 인한 허위 자백이라고 주장해도 판결에 영향을 미치기는 쉽지 않았던 시기다.

경찰의 ‘남영동’(대공 분실)은 높은 담과 위압적인 철제 정문부터 피의자들을 위축시켰다.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 씨가 이곳에서 조사를 받다 물고문으로 숨진 뒤 들어가 본 적이 있다. 피의자가 들어갈 때 몇 층으로 가는지조차 알 수 없게끔 계단은 달팽이 모양처럼 빙빙 돌게 돼 있었다. 당대의 ‘고문기술자’로 통한 이근안 경감을 배출한 악몽의 현장이다. 지금은 ‘경찰 인권센터’라는 간판을 단 인권교육장으로 변신했다. 내부에 ‘박종철 기념관’이 생겼고 물고문 현장도 옛 모습대로 재현됐다.

언론인들도 보도지침을 어겼다는 이유로 ‘남산’에 끌려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1980년대 중반 그곳 지하실로 연행된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군복으로 갈아입은 다음부터 상당 시간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다. 주황빛 전구가 괴물의 눈처럼 침침하게 비추는 방에서 많은 사람에게 참기 어려운 폭행을 당했다’고 저서에서 밝혔다. 심지어 “비행기에 태워 제주도로 가다가 바다에 떨어뜨려 버릴 수도 있고, 자동차로 대관령 깊은 골짜기에 데려가 아무도 모르게 땅에 묻어버릴 수도 있다”는 협박을 받았다고 한다.

그 무렵 필자도 대학생 시위 관련 기사 때문에 사흘간 남산의 추적을 받은 일이 있다. 죄 없는 도망자가 죄지은 도망자의 심정을 헤아려 본 기회였다. 붙잡히면 고문을 당하고 경찰 고위 간부인 취재원을 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릴 것이 뻔했다.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도망이 최선책이었다. 결국 필자의 무사 귀환으로 그는 고문과 파면을 면하고 경찰 총수에까지 올랐다.

‘서빙고’는 1979년 12·12사태 때 정승화 현직 육군참모총장까지 붙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한 곳이다. 서빙고 주인이던 보안사는 정 총장의 대장 계급장을 떼고 무등병으로 무려 18계급을 강등시켰다. 1990년 윤석양 이병의 ‘민간인 사찰 양심선언’을 계기로 보안사가 기무사로 바뀌면서 서빙고도 없어졌다.

20∼30년 전엔 고문 전성시대

국가기관들이 공공연히 고문을 자행하던 암울한 시대의 참담한 경험들이다. 1987년 민주화선언 이후 우리 사회에서 고문은 빠르게 사라지는 듯했다. 고문은 박물관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구시대의 유물이려니 믿고 있었는데 경찰이 느닷없이 뒤통수를 때렸다. 감시용 폐쇄회로(CC)TV를 교묘히 피하거나 영상을 감추면서 집단 가혹행위를 저질렀다니 서울 양천경찰서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 경찰인가.

지금은 부모도 자기 아이들을 함부로 다룰 수 없고, 애완견 같은 동물에게도 학대가 허용되지 않는 문명사회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가혹행위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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