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인규]김중수 총재의 ‘쿠데타’는 무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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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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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12일 창립 60주년을 맞았다. 그간 한은은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 한은은 통화정책 독립성의 많은 부분을 유보해야만 했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에야 비로소 한은의 핵심인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이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에서 한은 총재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은 총재의 4년 임기 역시 이 무렵부터 확실히 보장됐다.

그러나 1998년 이후의 제도적 독립성 보장에도 불구하고 그간 한은이 독립성을 제대로 지켜냈는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김중수 한은 총재만 해도 올해 3월 중순 기자들을 만나 “한은 독립은 대통령으로부터의 독립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물가냐 성장이냐의) 선택은 대통령이 하는 것”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이명박 대통령은 이런 김 총재가 마음에 쏙 들 것이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국민은 왠지 찜찜하고 불안하다.

한은 독립에 관한 김 총재의 발언이 타당하려면 대통령이 다음의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첫째, 단기적 경기부양의 유혹을 물리치고 중장기적 성장기반 확충에 심혈을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둘째, ‘집단적 사고(groupthink)’를 늘 경계할 줄 아는 대통령이어야 한다. 집단적 사고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면 모두가 모든 이슈에 동의하고 따라서 토론과 반대 의견이 사라지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이 현상은 미국 사회심리학자 어빙 재니스가 1960년대 케네디 대통령과 그의 유능한 참모들이 쿠바 피그만 침공사건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내리게 된 과정을 분석하면서 발견했다.

한은 독립이 ‘집단적 사고’ 막는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한은은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은이 제 몫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박 대통령이 앞서 말한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킨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관치(官治)금융’이라는 비판은 많았지만 중장기적 관점에서 금융정책을 실시했고 또 활발한 토론을 거쳐 정책을 결정했다.

그렇다면 이 대통령은 어떤가. 먼저, 단기적 경기부양의 유혹이나 포퓰리즘으로부터 초연한가. 그렇다고 대답하기 힘들다. 이 대통령 취임 후 발생한 미국발(發) 금융위기는 단기적 경기부양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최근 우리 경제가 예상을 뛰어넘는 높은 성장세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는 여전히 경기부양 정책을 멈출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또한 이 대통령은 2년여 전의 광우병 촛불시위 이후 여론 지지율 상승을 위한 대책으로 보금자리주택 사업이나 취업 후 학자금 상환제도 같은 포퓰리즘 정책에 눈뜨게 된 것 같다. 그러나 경제에는 공짜가 없다. 단기적 경기부양이나 포퓰리즘 모두 재정건전성 악화를 초래해 멀지 않은 장래에 혹독한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집단적 사고로부터 자유로운가. 한나라당의 6·2지방선거 패배는 정부, 여당과 청와대가 집단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다. 이 대통령 측근 가운데 ‘그들만의 생각’에서 벗어나 세상과 민심의 흐름을 정확히 읽은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이 대통령이 그런 측근을 곁에 두기를 꺼렸는지도 모르겠다.

민주적인 정부가 다음 선거 승리를 위해 경기부양이나 포퓰리즘을 사용하는 것은 일정 부분 민주주의의 제도적 결함 탓이다. 그래서 중앙은행으로 하여금 독립적 통화정책을 통해 행정부의 재정정책을 견제하도록 제도적 보완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집단적 사고는 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이 대통령 개인의 문제다. 세종대왕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는 집단적 사고를 늘 경계할 줄 알았다.

이런 환경에서 통화정책을 펴야 하는 한은 총재는 어렵고 고독한 자리다. 그 자리가 어려운 것은 불확실한 미래를 내다보며 현 시점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기준금리 인상 여부만 하더라도 가계부채 증가 문제와 더불어 ‘더블딥(경기 상승 후 다시 하강)’ 가능성도 함께 고려해야 하므로 결정이 결코 쉽지 않다.

포퓰리즘 재정 정책 견제해야


4년 임기가 보장된 한은 총재와는 달리 청와대나 기획재정부 관료들은 단기적 성과에 목말라 하고 집단적 사고에 빠지기 쉽다. 한은 총재 자리가 고독한 것은 이들을 상대로 ‘나 홀로 쿠데타’를 일으켜야 하기 때문이다. 쿠데타 이후 자신을 임명해준 대통령의 싸늘한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 것도 고독한 일이다.

한은 총재는 어렵고 고독하지만 동시에 영예로운 자리다. 한은 총재가 국민을 위해 일으킨 쿠데타는 역사가 높이 평가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김중수 총재가 한은 창립 60주년인 올해를 진정한 의미의 한은 독립 원년으로 만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인규 객원논설위원·한림대 교수·경제학 igkim@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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