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노희경]물려줄 유산이 있습니까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3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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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자식에게 유산을 남기지 않는다면, 부모가 준 유산을 그 자식이 가꾸고 챙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유기다. 법적 제재는 없지만 죗값은 받는다. 덜 행복하다.

나는 20대 중반에 집안의 수양딸이면서 친구인 동갑내기와 보증금 300만 원에 월 8만 원짜리 집을 얻어 분가했다. 경제적인 이유로, 외롭다는 이유로 다른 친구들과 살림을 합쳐도 보았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늘 둘이었다. 그리 12년을 사니 이후엔 가족이든 친한 친구든 사나흘을 함께 견디기가 힘들었다.

장례비 모아놓고 떠난 어머니

그러다, 7년 전 된서리를 맞았다. 큰오라버니와 살던 아버지가 덜컥 암이 걸려 오갈 데가 없어졌고(오라버닌 이민을 가야 했다), 작은오라버니의 사정으로 조카 둘을 맡게 된 것이다. 워낙 소음에 면역성이 없어 한여름에도 비바람 소리까지 피해 문을 닫아거는 성질인데 초등, 중학교를 다니는 놈들의 입심은 가위 전쟁이었다. 게다가 10년 넘게 떨어져 산 아버지는 오전 4시면 일어나 텔레비전을 켜시고, 주방을 들락날락, 화장실을 갔다 말았다, 가만 있어도 정신이 없었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사이좋은 막내언니네와 살림을 합쳤다. 언니와 형부의 유한 성격으로 집안의 화목을 부르고, 은근 무거운 짐은 나눠 지자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점입가경, 언니네 애들이 합세해 애들이 갑자기 넷이 되었다. 그것도 학년이 거의 같은, 고만고만한 사고뭉치 사춘기 놈들이.

지금 생각하면 그게 다 사람 사는 맛이고 웃음거리지만, 그땐 참 막막했었다. 얼마 전 아홉 가족이 살던 집을 부동산에 내놓고, 어른 넷만 살 작은집을 마련하려 하고 있다. 아버지는 임종을 하셨고, 스무 살에 분가시킨다는 원칙을 지켜, 남자애들은 작년, 재작년에 하나하나 분가시키고, 여자애 둘은 고3인데 내년에 분가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자꾸 아이들에게 미안해지는 맘을 어쩔 수가 없다. 어머니, 아버지가 내게 주신 유산에 비해 그들에게 줄 유산이 턱없이 모자람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햇수로 19년, 부친을 여읜 지 4년째다. 어머니는 시금치나물에 김치, 구운 김에 생선 한 조각으로 1식 1, 2찬을 지키며 알뜰히 돈을 모아 유산으로 현금 400만 원을 남기셨다. 어린 시절 반찬 투정이 나서, ‘우리도 좀 더 먹자, 통장에 돈 있잖아!’ 하면, ‘내 죽어서 장례 치를 돈이다, 거들떠도 보지 마라’ 하신 그 돈이다. 당시 어머니의 연세는 마흔 초반. 어머니의 집안은 단명(短命)이 내력이어서, 젊어서도 자신의 생을 예감하였는가 싶다. 예감은 사실이 되어 어머니는 쉰일곱 청춘에 돌아가셨다. 유산 400만 원은 어머니의 말씀대로 장례비로 고스란히, 요긴히 쓰였다. 아버진 더욱 남기신 게 없다. 평생 백수로 자식들이 준 용돈으로 사셨으니, 돌아가실 때 남겨진 건 현금 몇십만 원과 대출금이 무섭게 붙어 있는 20평짜리 성남의 오래된 빌라가 전부였는데, 그것도 대부분 큰오라버니의 수고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제 와 부모가 준 유산이 넘치고 넘치는 것을 느낀다. 몇 가지라도 나열해 자랑하고 싶다.

내가 물려받은 최고의 유산은

1. 두 분은 배우지 못하여, 지식으로 사람을 무시하지 않으셨다. 2. 두 분은 영민하지 못하여, 영민하지 못한 자를 무시하지 않으셨다. 3. 어머니는 아침이면 동네의 쓰레기를 주워 동네를 깔끔하게 하고, 쓸 만한 물건들을 챙겨 동네 경로당에 갖다놓아 숱한 어른을 봉양했다. 4. 어머닌 말이 없고 말이 독하지 않아 말로 사람 가슴에 비수를 꽂지 않으셨다. 5. 어머니는 시장에서 주워 온 썩은 감자, 고구마, 배추를 다듬어 전을 만들고 음식을 만들어 자식을 살리고 이웃과 나눴다. 6. 두 분은 평생을 가난하여 가난한 사람을 늘 자신처럼 안쓰러이 여긴 까닭에, 두 고아를 거두어 출가까지 시켰고, 남들 없는 수양딸도 두었다. 7. 아버진 돈이 있으면 늘 주변에 쓰시며 얻어먹는 것보다 주는 기쁨이 크다는 걸 강변하셨다. 8. 어머닌 마흔 후반부터 이미 늙어 이가 빠지고, 백발로 병환에 시달렸지만 아프다는 한탄을 일삼기보단 힘 좋아 자식들 기죽이지 않는 걸 늘 다행으로 여기셨다. 9. 두 분은 먹고살기만 하면 무엇보다 가족 간의 정이다 하셨다. 10. 두 분은 모두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는 과정이 참으로 의연하고 아름다워, 죽음이 그다지 두려운 게 아니라 아름다운 마감의 기회라는 지혜를 주셨다.

어찌 내가 받은 유산이 이것뿐이겠는가. 유산이 그득하니, 문득문득 사는 게 참 행복하다. 명심보감에 이런 말이 있단다. 자식에게 최고의 유산은 부모의 음지에서의 선행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조카들에게 후배들에게 남겨줄 진짜 유산을 모으는 게 어른인 내가 ‘지금’ 할 일이겠다 싶다. 이제 나를 떠나는 조카들에게 하는 당부 말로 이 글을 마감하려 한다.

세상이 무섭다고 지레 겁먹지 마라. 너네 부모도 나도 즐거이 살아온 세상이다. 세상은 너희의 생각보다, 훨씬 더 아름답단다. 겁내지 마라. 사랑한다.

노희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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