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윤평중]미실과 박근혜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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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美室)은 TV 드라마 ‘선덕여왕’이 낳은 최고의 캐릭터이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덕만(재위 632∼647)의 최대 적수이자 흥미진진한 개성을 지닌 정치 거물로 등장한다. 미실을 캐릭터라 지칭한 이유는 표준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실이 완전히 가공의 인물인 건 아니다. 위작 논쟁에 시달린 박창화의 ‘필사본 화랑세기’에서 미실은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3대에 걸쳐 활약한 정계의 막후 실세로 묘사된다.

뼈대만 있는 화랑세기의 미실에 풍부한 상상력의 살을 덧붙여 재창조된 드라마의 미실은 전형적인 마키아벨리스트다. 대의명분과 책략을 섞어 정치판을 요리하고 자기 세력을 이끌며 대권을 노린다. 동시에 미실의 지평은 마키아벨리즘을 넘어선다. 냉혹하기 짝이 없는 권력정치의 달인이면서도 무한한 매력과 카리스마로 적에게조차 흠모와 경외의 대상이 된다. ‘연모의 정은 새에게나 줘버려라’라고 일갈하면서도 왕을 비롯한 여러 호걸을 정인(情人)으로 품은 낭만주의자이기도 하다.

남성에게 의존하기는커녕 오히려 왕과 장군들을 거느린 ‘독립 여성’ 미실의 원대한 꿈은 필생의 숙적 덕만에 의해 좌초한다. 하지만 공주 덕만이 우리 역사 최초의 여왕으로 비상하는 도정에 가장 큰 자극을 준 스승은 바로 미실이었다. 미실과 겨룸으로써 덕만이 민심을 다스리는 방법과 정치공학을 학습하고, 마키아벨리즘의 차원을 넘어 ‘사람을 얻는 자가 시대의 주인이 된다’는 미실의 말을 실천해 최후의 승자가 되기 때문이다.

국가 미래에 불리한 세종시 행보

드라마 도입부에서 미실은 현실주의자로, 그리고 덕만은 이상주의자로 그려진다. 용과 호랑이처럼 일진일퇴하면서 미실은 차츰 이상주의의 힘을, 그리고 덕만은 현실주의의 위력을 깨닫는다. 정치의 길에서 마주 선 스승과 제자는 부단히 승패를 교환하지만 궁극적으로 미실의 패배는 예정되어 있었다. 왕후 자리만을 노린 미실이 어떤 여자도 꿈꾸지 못한 왕의 비전을 품은 덕만 앞에서 비탄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드라마는 허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때로 드라마는 현실보다 더 극적인 현실감을 지니며, ‘선덕여왕’이 바로 그런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선덕여왕’은 신라를 배경으로 한 강력한 ‘현대정치극’임이 분명하다. 시대를 관통하는 정치의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를 떠올리는 건 불가피한 일이다. 제왕적 대통령제인 한국에서 박 대표는 전무후무한 ‘제왕적 차기 대통령 후보’다. 권능의 정점에 서 있는 현재 권력과 정면에서 마주 겨룰 수 있는 박근혜 같은 미래권력의 존재를 한국정치사는 일찍이 경험한 바 없다. ‘MB 여당’의 진정한 상대가 지리멸렬한 야권이 아니라 ‘GH의 여당’임은 천하가 알고 있는 비밀인 것이다.

미실처럼 박 대표도 부동의 지역적 권력 기반 위에 서 있고, 원칙과 신의의 정치인이라는 매력과 카리스마로 경외와 흠모의 대상이다. ‘살아 돌아오라’는 GH의 말 한마디로 친박연대가 탄생할 정도다. 게다가 GH는 ‘박정희 왕조의 공주’였으며 어머니의 비극적 죽음과 함께 20대 초반부터 5년간 퍼스트레이디였다. 그 후 20년 망각의 세월을 거쳐 1998년 다시 정치에 들어선 고난의 이력이 단아하면서도 단호한 박 대표의 얼굴에 녹아있다. 현실권력의 정점과 영점(零點)을 처절하게 체험했고, 권력의 극점에 또다시 접근한 유일한 한국 정치가인 GH의 자태에는 ‘박정희 신화’가 교차한다. 국가와 역사를 논할 때 박 대표의 진정성이 다른 정치인과 격이 다른 것은 이 때문일 터이다. 이런 GH가 세종시 문제에서 자신의 정치적 장래에는 유리하지만 국가의 미래에는 불리한 행보를 택한 건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여야합의로 국회를 통과한 세종시 원안은 국토균형발전의 대의(大義)와 절차적 정당성이라는 명분을 갖췄다. 그러나 불행히도 실질적 수도분할의 역기능은 대의명분 준수의 순기능을 압도할 것이 너무나 명명백백해 보인다.

‘죽어서 사는’ 큰 정치인의 길

난공불락의 대야성에 웅거해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던 미실은 백제군이 진군해오는데 최전방의 속함성 부대가 자신을 도우려고 전선을 이탈하자 회군을 명령하고 자결한다. ‘백성은 진실을 부담스러워한다’고 선언했던 미실이 국가의 진실과 직면한 대목이었다. 결국 미실은 ‘죽어서 사는’ 큰 정치인의 길을 갔지만 세종시와 관련해 박 대표는 어떤 길을 갈 것인가. 허구의 드라마가 엄혹한 정치의 진실을 직격(直擊)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윤평중 객원논설위원·한신대 교수·사회철학 pjyoon56@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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