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종식]재판 현장서 정년 채울 법관 안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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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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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고위 법관 출신인 한 변호사가 기자에게 신세 한탄을 쏟아냈다. 법원에 있을 때는 1억 원 안팎의 연봉에 차량과 기사, 비서까지 지원받으며 차관급 이상의 지위를 누렸지만 지금은 사건 수임 실적에 치여 회사와 집에서 눈치 보기 일쑤란 얘기였다. 그는 “고위 법관이라고 해서 고액의 계약금과 연봉이 보장되던 시절은 옛말”이라며 “대형 로펌에서 고위 법관이 찬밥 신세가 되다 보니 또래 법관들에게도 변호사 개업을 말리고 있다”고 털어놨다. 변호사 업계의 불황으로 고위 법관조차 쉽게 개업하기 어려운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얘기다.

현재 전국 고등법원(5곳)과 지방법원(20곳)에서 법원장으로 재직 중인 법관들은 사법연수원 6기(1974년 사법시험 16회)부터 11기 출신들이다. 당장 내년부터 11, 12기 후보자들이 법원장 보직을 받고 나가야 하지만 자리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실제로 대법관을 제외한 11기 법관 수는 현재 16명, 12기는 20명으로, 선배 법원장들이 모두 퇴직한다고 해도 법원장 자리는 한참 모자란다. 현직 법원장들도 변호사 업계의 불황으로 퇴직을 꺼리고 있어 인사 적체는 갈수록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차기 인사에 골머리를 썩고 있는 법원행정처는 딱히 묘안이 없는 상황이다. 급기야 박일환 법원행정처장은 10월 말 열린 전국 법원장 워크숍에서 “지금처럼 서열 순으로 법원장을 지내지 말고 법원장 지원을 받아 선발하는 제도를 실시해 나머지 법관은 재판 현장에서 정년을 채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법원장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후배 법원장 아래서 재판하는 사례는 자존심상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풍토 때문이다.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법원장들의 나이는 50대 중반. 정년까지는 10년 안팎이 남았지만 등 떠밀리듯 옷을 벗어야 하기 때문에 법관으로서의 경륜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국민들로서는 사실심인 1, 2심에서 경륜 높은 법관들에게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조차 차단되는 것이다.

나이 많은 판사들이 체력 등의 한계로 제대로 판결을 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10년 단위로 실시되는 법관 재임용 평가를 현실화해 부적격 판사를 제대로 걸러낸다면 큰 문제가 안 된다. 또 고등법원에 연구관을 두거나 독일처럼 고등법원에 단독판사를 두는 방안도 고민할 거리다. 정년을 채우려는 법관이 늘면서 현재의 인사제도로는 법원의 인사 적체 해소는 물론 국민의 눈높이도 채우기 힘들어 보인다. 지금은 제도 개선과 함께 관례를 깨고 재판 현업에 복귀하겠다는 현직 법원장의 용기 있는 선언이 절실한 때다.

이종식 사회부 be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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