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육정수]베트남에서 아프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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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30일 20시 00분


한국은 1964년 9월 베트남전쟁터에 이동외과병원 및 태권도 교관단 140명을 파견했다. 대한민국 역사상 첫 해외 파병이다. 이듬해 초엔 비둘기부대(건설지원단) 2000명을 보냈다. 베트남전쟁이 확전(擴戰) 양상을 보이면서 국내에선 주한미군 2개 사단(2사단, 7사단) 중 1개 사단의 베트남 이동 가능성을 놓고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었다.

朴대통령, 전투부대 파병 결단

1965년 3월, 초대 주(駐)베트남 한국군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당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불려갔다. 그는 베트남 파병 문제일 것으로 직감했다. 비전투부대 파견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는 바짝 긴장했다. 박 대통령은 평소와 달리 무거운 얼굴에 담배연기를 연거푸 뿜어냈다. 잠시 후 “베트남에 전투부대 보내면 잘 싸우겠지”라고 다짜고짜로 물었다. 채 장군은 작심을 하고 반대의견을 밝혔다.

“베트콩(공산 베트남군)은 프랑스와의 8년 전쟁에서 이긴 뒤 베트남의 남북 분단 이후까지 약 20년의 게릴라전 경험이 있습니다. 세계 최강의 게릴라군으로 성장해 정규군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처음엔 불쾌해하던 박 대통령은 “그럼, 미군도 힘들겠구먼”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각하. 미국은 베트남 땅 전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모든 베트남 사람을 몰살할 수 있는 군사력이 있지만 국제여론 때문에 못합니다. 상황 진전을 좀 지켜보시지요. 전쟁이 더 확대돼 주한미군을 베트남에 보내려 한다면 그때 가서 판단하셔도 됩니다.” 박 대통령은 “나도 바로 그 점이 걱정이야”라며 얼굴을 굳혔다.

채 장군이 회고록 ‘베트남전쟁과 나’에서 밝힌 박 대통령과의 독대(獨對) 내용이다.

그 무렵 베트남전은 계속 악화돼 미군은 공산 북베트남에 융단폭격을 하고 지상군 6만여 명을 증파하는 강공책을 썼다. 국내에선 전투병 파병 문제로 정치권과 사회 전체가 시끌시끌했다. 신중론과 반대론이 만만치 않았다. 미국의 용병(傭兵)이니, 청부(請負)전쟁이니 하는 비난도 나왔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이미 전투부대 파병을 기정사실화했다.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과 방위보장 확보, 국제적 지위 향상, 외화 획득 등이 이유였다. 결국 박 대통령은 1965년 10월 전투부대 파병을 개시해 주한미군의 베트남 이동을 막았다. 당시 한반도 안보상황은 북한 김일성이 “우리가 밀고 내려가면 잃는 것은 휴전선이요, 얻는 것은 통일”이라고 호언할 정도로 위급했다.

44년 전의 베트남과 지금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은 흡사하다. 정규군이 상대하기 어려운 탈레반의 게릴라전, 인명피해 증가와 증파 여부를 둘러싼 미국의 고심, 주한미군의 이동배치 가능성 등이 베트남전 때와 같다. 북의 위협적인 군사력과 파병에 대한 국내 여론의 분열도 마찬가지다.

李대통령의 전략적 안목 필요

정부는 어제 아프가니스탄 재건팀 추가 및 경비병력 파견 방침을 발표했다. 전투부대 대신 민간인과 경찰, 군(軍)으로 구성된 비전투요원을 파견하기로 했다. 2007년 그곳에 파견됐던 다산부대(공병대) 병사 한 명과 기독교 선교팀 2명의 희생이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그러나 언제 다시 전투부대 파병 문제가 대두될지 알 수 없다. 우리에겐 2012년의 한미연합사 해체 및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주한미군의 이동 가능성을 고려한 전략적 선택이 필요하다.

최근 ‘주한미군 이동 배치’를 시사한 마이클 멀린 미 합참의장의 발언은 언제든 현실화할 수 있는 미국의 카드다. 우리 안보를 보장하는 주한미군 2만8500명의 유지를 미국의 일방적 시혜와 희생에만 기댈 수는 없다. 우리도 상응하는 희생정신을 보일 때 미국은 우리를 끝까지 지키려고 애쓸 것이다.

군은 적(敵)과 싸우는 집단이다. 강한 군대는 실제 작전경험이 요체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전략적 안목을 갖고 앞장서서 국회와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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