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권순택]‘丁·千·崔·李’ 정치 쇼

  • 입력 2009년 10월 12일 20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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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정치인은 선거에서 떨어지면 사람도 아니다.’ 정치인들이 흔히 하는 이 말은 국회의원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의원은 세비 수당 상여금 활동비 등으로 약 2억 원의 고액 연봉을 받는다. 회기 중 불체포특권과 면책특권도 있다. 입법권과 예산 심의권, 국정 조사 및 감사권이 있고 6명의 보좌진을 둘 수 있다.

이런 좋은 조건을 포기하겠다는 ‘소신파’ 의원이 현재 4명이나 된다. 7월 22일 한나라당의 미디어법안 일방 처리에 반발해 사직서를 낸 민주당 정세균 대표와 천정배 최문순 의원, 박연차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됐던 이광재 의원이다. 물론 이들은 사직 처리되더라도 ‘연로 지원금’ 혜택은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연로 지원금은 하루라도 의원 배지를 달면 만 65세 이후 매달 110만 원을 평생 받는 제도다.

이들은 모두 국회 의원회관에서 철수했다. 보좌관과 비서관들의 사표는 진작 수리됐다. 세비는 이들 의원이 수령을 거부해 정부 보관금 계좌에 들어가고 있다. 이달 5일부터 ‘국회의원 의정 활동의 꽃’이라는 국정감사가 한창이지만 이들은 국감장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의원으로서의 권한도 의무도 모두 포기한 것이다. 형식상 이들의 의원직 사퇴의 진정성을 의심할 근거는 많지 않지만 속단은 금물이다.

정 대표가 수원 장안 재선거에 출마할 민주당 후보의 선거사무소 개소식에서 그제 한 말을 듣고 내 귀를 의심했다. “수원시민 여러분께서 우리 민주당에 한 석을 보태주시면 저희 민주당이 앞장서서 보은할 것이라고 저 민주당 대표 정세균이 확실하게 약속드리겠습니다.” 천 의원 역시 안산 상록을 재선거 후보 단일화를 위해 다른 야당 후보를 압박하고 있다고 한다. 의석 4개를 내던진 정당의 대표가 어떻게 한 석을 보태달라고 사정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 의원은 구속 직전인 3월 27일 의원직 사퇴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국회의원의 기득권을 모두 버리고 평범한 사람으로 재판에서 진실을 가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의원직 사퇴서를 낸 것은 5개월 반이 지나서 재판이 끝나가던 지난달 9일이었다. 지난달 23일 집행유예로 풀려난 그는 “지역 현안을 챙기는 데 게을리 하지 않겠다”며 움직이고 있다. 비례대표인 최 의원은 탈당계만 제출하면 의원직을 깨끗이 버릴 수 있는데도 왜 그 방법은 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민주당원 신분까지 포기할 수 없다는 애당심의 발로인가.

이들의 의원직 사퇴에 관한 진정성을 의심할 구석이 없지는 않지만 그들의 소신과 결단은 존중돼야 한다. 명색이 제1야당 대표, 법무장관을 지낸 4선 의원, 방송사 사장 출신 의원, 386 간판급 정치인이 소신을 지키지 못하게 돼 정치 쇼를 했다는 비난을 듣게 해서야 될 일인가.

본회의 의결이나 국회의장 결재 없이도 의원직 사퇴를 가능토록 하는 국회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돼 있다. 해당 선거구 선거관리위원회에 서면 신고하는 것으로 사퇴절차가 끝나는 미국식이다. 영국에서는 1985년 의원 8명이 ‘영국-아일랜드 협정’에 항의해 의원직 집단 사퇴를 했다. ‘칠턴 헌드레즈’라는 명목뿐인 자리에 지원하는 것으로 사퇴할 수 있는 편리한 제도를 이용했다.

이제 우리 국회도 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국회의원 못해먹겠다’는 의원들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해줘야 한다. 공작정치로 야당 의원을 사퇴시키던 독재시대도 아니지 않은가.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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