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임규진]대한민국에 태어나 고맙다?

  • 입력 2006년 11월 3일 19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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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삼성전자에 다니는 대학 동창생이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정말 고맙다.”

“무슨 소리냐.”

“이렇게 좋은 회사에 다니도록 해 줘서….”

기억을 더듬어 봤다. 1980년대 중반 필자가 대학원에 다닐 때 그는 군대 갔다 온 복학생이었다. 졸업을 앞둔 그는 ‘어느 회사에 취직하면 좋을까’라고 상의해 왔다. 동창생들은 고시를 보거나, 외국 유학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 필자는 “기업에 가기로 했으면 삼성이 낫지 않겠느냐”고 말했던 것 같다.

그가 입사한 뒤 삼성전자는 세계 초일류기업으로 성장했다. 고급 공무원이나 대학교수보다 많은 월급을 받고 미래 비전도 밝으니 고맙다는 인사를 할 만도 하다.

하지만 몇 년 뒤에도 그가 같은 말을 할지는 미지수다. 그가 전화한 진짜 이유는 규제 불만이었다. 그는 “규제 탓에 업무를 제대로 할 수 없다. 대한민국은 기업하기 어려운 나라다. 나쁜 규제를 없애는 데 언론이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규제 완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삼성전자도 어려워질 것이란 경고로 들렸다.

하지만 규제에 시달려도 삼성전자 직원들은 지금 ‘대한민국에 고맙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주 토요일에 만난 택시운전사의 절망을 들어 보자.

“죽도록 일해 봤자 한 달에 손에 쥐는 것은 130만 원이에요. 불경기로 서민들만 죽어 나가요.”

“요즘 행복하다는 손님이 있나요.”

“그런 손님 한 명도 못 봤어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싫대요. 다들 기회 닿으면 이민 간대요.”

4년 내리 저성장이 지속되니 택시 경기라고 좋을 리 없다. 불경기는 자영업자와 서민부터 고사(枯死)시킨다. 부동산정책 실패에서 보듯 현 정권의 총체적 무능이 빚은 결과다.

서민들은 내년에도 대한민국에 태어난 걸 원망할 것 같다. 주요 경제연구소들은 우울한 경제전망을 내놓았다. 내년도 성장률을 4%대 초반으로 보는 연구소들이 많고, 한국경제연구원은 3%대를 예상했다. 이 전망치는 북한 핵실험에 따른 후유증 등 대외 악재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수치다.

내년에 대외 악재가 현실화되면 경제의 약한 고리가 끊어지면서 모든 국민이 불행해지는 경제위기가 올 수도 있다. 러시아 혁명의 주역인 레닌은 “강고한 쇠사슬도 약한 고리를 때리면 끊어진다”고 주장했다. 경제대국이든 경제소국이든 마찬가지다.

대학 동창생이 지적한 규제는 경제의 약한 고리를 서서히 끊어 놓고 있다. 민간의 활력과 창의를 짓눌러 시장경제를 질식시킨다. 출자총액규제와 수도권규제 등 코드 규제가 대표적이다. 게다가 북한은 핵실험으로 한국경제의 약한 고리를 망치로 때리고 있다. 세계 12대 경제대국이라고 자만할 때가 아니다.

그나마 위기의식을 느낀 열린우리당 김한길 원내대표는 지난달 31일 노무현 대통령에게 “널리 인재를 구해 드림팀을 짜고 남은 임기 동안 안보와 경제에 총력을 기울이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1일 코드인사로 대응했다. 실패한 코드정책을 고수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경제의 약한 고리를 끊어서 삼성전자 직원들마저 대한민국을 원망하도록 만들자는 것인가.

임규진 경제부 차장 mhjh2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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