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레스트 횡단기]세계 최고봉서 나는 희망을 보았다

  • 입력 2006년 5월 31일 03시 04분


코멘트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나는 산악인 탐험가로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했고 세계 7대륙 최고봉도 모두 올랐고 남극과 북극점도 밟았다. 처음으로 산악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지난해 5월 1일, 나는 정확히 북극점을 밟았다.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에 북극점 좌표인 N90.000이 찍힐 줄은 나도 몰랐다. 하지만 한발 한발 다가가면서 결국 손에 든 GPS 단말기에 N90.000이 찍혔을 때 너무 놀랐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제 그만하자고…. 그리고 집사람과 성우 성민 두 아들과 남들처럼 알콩달콩 살아갈 상상에 가슴이 부풀었다.

그러나 나는 역시 산사람이다. 매연이 뿌연 서울 한복판에선 내가 서 있을 곳이 없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번뜩 세계 최고봉 해발 8850m 에베레스트가 생각났다. 에베레스트는 나에겐 참 버거운 산이다. 1991년 첫 히말라야 8000m 도전이 에베레스트였으나 그해 나는 절벽에서 추락해 얼굴이 절반 가까이 함몰됐다. 5번의 도전 중 4번이나 큰 사고가 났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1993년 아시아 최초로 무산소 등정에 성공했다.

그래, 더 어려운 일을 해 보자. 단일팀 최초의 횡단을 한번 시도해 보자. 예상은 했지만 준비 과정부터 만만치 않았다. 중국(티베트)에서 네팔로 넘어가는 루트. 국경을 넘는 것이니 양국의 협조가 필요한데 허가를 받는 것부터 하늘의 별 따기였다. 하지만 ‘세계 최초 산악그랜드슬램 달성’이라는 훈장이 힘을 주었다.

2001년 K2를 끝으로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뒤 만 5년 만에 다시 찾은 히말라야는 고향이 아니라 낯선 곳이었다.

남들은 상업등반대가 깔아 놓은 로프를 잡고 비교적 안전하게 등반했지만 나는 비탈길을 피켈로 찍어 가며 올랐다. “로프를 이용하려면 사용료를 내라”는 상업등반대의 말에 산악인으로서 화가 났기 때문이다.

정상이 다가왔다. 아∼. 1993년 이래 13년 만에 다시 밟는 세계 최고봉. 나는 그곳에서 나를 돌아봤다. 내 나이 43세. 다시 못 올라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순간 없어지고 나는 계속할 수 있다는 희망과 꿈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문제는 내려가는 것이었다. 네팔 쪽엔 눈이 많이 내려 수많은 원정대가 진을 치고 있었지만 8000m 위쪽엔 캠프가 하나도 없었다. 체감온도 영하 40도의 8000m에서 텐트 없이 밤을 새우면 최소한 손가락 발가락 몇 개를 자를 각오를 해야 한다.

순간 바람이 불어왔다. 북풍이었다. 나를 남쪽으로 밀듯이 불어오는 바람. 그 바람에 힘입어 나는 “약속한 대로 네팔로 내려갑니다”라는 무전 교신을 하고 발길을 옮겼다.

아뿔싸. 그냥 내려와도 시원치 않을 판에 힐러리 스텝(8600m)을 내려오다 낡은 로프에 왼발이 감겨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렸다. 한 20분 동안 풀어 보려고 기를 썼으나 헛수고였다. “내가 이대로 죽으면 네팔 쪽에서 올라오는 친구들 큰 구경하겠구먼.” 티베트 쪽에서 올라오다 본 등반 루트 바로 옆에 꽁꽁 언 채로 있는 시체만 2구, 내려오면서 본 시체는 무려 5구. 여기에 내가 덧붙여지는구나.

“와∼.” 다행히 오른발이 바위에 걸려 몸을 세워 묶인 로프를 풀 수 있었다.

결국 나는 정상을 향해 티베트 쪽 캠프를 출발한 지 만 26시간 30분 만에 해발 7300m에서 스위스 팀이 만들어 놓은 빈 텐트를 발견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딱딱한 얼음 위였지만 10시간 동안 달콤한 잠을 잤다. 꿈도 꿨다.

응원하는 팬들의 소란에 잠에서 깨자마자 나는 또 생각했다. “다음엔 어디를 목표로 삼을까?” 나는 역시 산사람이다.

박영석 히말라야 등반대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