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아침 새지평]한보사태를 보면서

  • 입력 1997년 2월 4일 20시 34분


두 제자가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을 두고 다투는 것을 스승인 慧能(혜능)이 보았다. 한 제자는 흔들리는 건 깃발이라 했고 다른 한 제자는 무슨 소리냐, 흔들리는 건 다만 바람이라고 했다. 혜능대사는 선종(禪宗)의 제6조(祖)로 돈오(頓悟)를 주장했던 선사였다. 제자들의 다툼을 보던 혜능대사가 일갈(一喝)했다. ▼ 혜능대사의 一喝 ▼ 『이놈들아, 흔들리는 건 오직 너희들 마음이로다』 요즘 진행되는 「한보사태」를 보며 어쩐 일인지 계속 이 삽화가 떠오른다. 여태껏 확실한 것은 한보의 부도뿐인데 진실을 뒤덮고도 남을만큼 온갖 소문이 무성하고 그 소문의 불똥이 행여 내게로 튈세라 바쁘고도 강팔진 말, 말뿐이다. 특히 「정면돌파」라는 말을 앞세운 여당의 힘있는 분들 발언이 더더욱 그렇다. 순진하게도 나는 「정면돌파」라는 말이 정치적으로 사태의 진실을 호도하지 않고 오로지 정정당당하게 진실을 밝히겠다는 소리인줄로만 알았는데 그 「정면돌파」라는 말 뒤에 딸려나오는 발언들을 보니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하겠다, 그런 뜻이 강하게 느껴지니 난감하다. 수조원에 이르는 불가사의한 대출에 대해 조금이라도 책임지겠다는 사람은 없고 모두가 나는 아니야, 나는 그 사람 몰라, 증거가 있으면 대봐, 할뿐이다. 우왕좌왕 숨기에 바쁘고 숨어있다가 고개 삐쭉 내밀곤 괜한 큰소리, 증거를 대봐, 그리곤 다시 숨는다. 증거를 대보라는 어조엔 증거만 댔다간 가만두지 않겠다는 그런 반어법적 이미지가 느껴진다. 과거, 육영수여사가 총에 맞았을 때, 박정희대통령에게 충성을 아끼지않던 수많은 고위관리들이 대통령내외야 죽거나 말거나 우선 살고 보자며 이리저리 숨던 그림도 지금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그래서 숨가쁜 위급상황의 지금 단상엔 대통령 혼자 남아 있다. 만약 그분도 연단 뒤로 주저앉아 숨으면서 내탓이 아냐, 너희들이 나가봐 하고 공소하게 소리친다면 얼마나 슬픈 희화가 될까 싶다. 혜능대사가 그립다. 과연 「한보사태」에서 혜능대사의 역할을 할 사람, 혹은 그룹은 없는 것일까. 검찰일까. 아니, 언제나 그래왔듯이 아마도 혜능대사의 참된 역할을 감당해야 할 사람은 수많은 보통사람, 우리 국민들일 것이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그동안 한보가 조성한 비자금이 1조원을 훨씬 넘는다고 한다. 또 소문으로서가 아니라 한보철강의 실질적 관계자 여럿이 장부상 투자액은 5조원이지만 실제투자액은 4조1천억원 또는 4조3천억원 정도라고 증언하고 있다. 7천억원 이상의 돈이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 흔들리는 정치인 良識 ▼ 우리는 해법을 알고 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올바른 해법을 짐짓 모른 체, 흔들리는 게 깃발이다, 바람이다 우기는 것은 일차적 책임을 짊어져야 할 정부고관이나 고위층 정치지도자 뿐이다. 혜능대사는 그러나 흔들리는 것이 깃발도 바람도 아니요, 그들의 양식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다만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우리에게 결함이 있다면 잘 잊는다는 것이다. 노동관계법 안기부법의 날치기통과도 그 결함을 계산하고 일어난 일일 터이다. 부디 이번엔 똑바로 끈질기게 본질을 살펴보고 그리고 끝까지 잊지말자. 박범신<작가·명지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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