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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만나는 다양한 창의성의 이야기로 한 스푼의 영감을 채워드립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하면 흔히 떠올리는 것이 ‘여인들의 초상화’입니다.클림트는 의뢰로 사교계 여성을 그리는가 하면, 상징에 빗댄 여자들의 누드를 그리고, 작업실에서는 이런 누드화의 모델을 선 여자들의 적나라한 포즈를 그렸습니다.생전 클림트는 “나라는 사람은 흥미로울 구석이 하나도 없다”며 “나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림을 봐달라”며 사생활을 숨기려 했죠.그러나 수많은 여인을 그림으로 남긴 데다, 세상을 떠난 뒤 ‘숨겨둔 자식’들 10여 명이 유산을 요구하며 나타나 ‘클림트의 여인들’에 대한 관심은 지금도 끊이지 않는 이야깃거리입니다.오늘은 그 중 평생 클림트와 함께했던 여인이자 ‘키스’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뮤즈, 에밀리 플뢰게의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바람둥이’ 클림트 눈 감아준 헌신적 여자?클림트와 플뢰게는, 클림트의 동생과 플뢰게의 언니가 결혼하며 사돈 관계로 알게 됩니다.클림트가 29세 젊은 화가일 때, 17세인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을 그렸는데, 가족이나 주변 사람을 모델로 흔히 그

1897년 오스트리아 빈.전통적인 아카데미 예술이 아닌 ‘새로운 예술’을 꿈꾸는 사람들이 모여 ‘빈 분리파’를 결성하고 구스타프 클림트를 대표로 선출합니다. 여기엔 건축가 요셉 호프만, 디자이너 콜로먼 모저도 함께 있었죠.‘시대에 맞는 예술’을 보여주겠다는 이들의 꿈은 20년도 이어지지 못하고 잿더미가 됩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수많은 사람이 각기 다른 꿈을 꾸었던 대도시 빈. 이곳의 예술 작품과 그 안에 담긴 여러 겹의 사회상을 소개합니다.극적인 탐미주의, 클림트빈 예술가들이 새로운 예술을 모색한 된 계기는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예술이었습니다.다만 이들이 추구했던 예술은 ‘신성한 봄’(빈 분리파가 발간한 저널)이라는 말처럼 다소 모호합니다.같은 시기 후기 인상파 작가인 세잔이나 고갱이 개인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었다면, 클림트의 작품은 장식적인 경향이 강합니다.키스, 연인, 삶과 죽음 같은 소재는 추상적이고 드라마틱하죠.이 때문에 불과

1897년 오스트리아 빈. 전통적인 아카데미 예술이 아닌 ‘새로운 예술’을 꿈꾸는 사람들이 모여 ‘빈 분리파’를 결성하고 구스타프 클림트를 대표로 선출합니다. 여기엔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 디자이너 콜로만 모저도 함께 있었죠. ‘시대에 맞는 예술’을 보여주겠다는 이들의 꿈은 20년도 이어지지 못하고 잿더미가 됩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각기 다른 꿈을 꾸었던 대도시 빈. 그곳의 예술 작품과 그 안에 담긴 여러 겹의 사회상을 소개합니다.극적인 탐미주의, 클림트 빈 예술가들이 새로운 예술을 모색하게 된 계기는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예술이었습니다. 다만 이들이 추구했던 예술은 ‘신성한 봄’(빈 분리파가 발간한 저널)이라는 말처럼 다소 모호합니다. 같은 시기 후기 인상파 작가인 세잔이나 고갱이 개인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었다면, 클림트의 작품은 장식적인 경향이 강합니다. 키스, 연인, 삶과 죽음 같은 소재는 추상적이고 드라마틱하

에드바르 뭉크의 가장 유명한 그림이자 20세기 모나리자로 불리는 작품 ‘절규’에는 연필로 쓴 글씨가 있다는 것 알고 계신가요?노르웨이 오슬로 국립 미술관에 가면 볼 수 있는 ‘절규’(1893년) 이야기입니다. 글씨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미친 사람만이 그릴 그림’뒤늦게 발견된 이 글씨를 누가 썼느냐는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던 미스터리인데요.노르웨이 국립미술관 연구팀이 재개관을 준비하며 그 비밀을 밝혀냈습니다. 글씨를 쓴 범인은 바로 뭉크였습니다.‘나는 미친 사람인가?’이 글씨가 뭉크의 필적이라는 여러 가지 근거 중 하나는 1895년 어느 모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뭉크는 이 때 ‘절규’를 오슬로의 갤러리에 전시합니다. 전시에 관해 학생 토론회가 열린 밤, 한 의대생이 뭉크의 그림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저는 이 작품을 그린 사람의 정신 상태가 의심됩니다.”뭉크는 이 말에 큰 상처를 받습니다. 몇 십년이 지났을 때도 이 때 일을 곱씹으며 일기에 적었을 정도로 말이죠.자신의 그림을 폄하

1606년 어느 날 밤 이탈리아 로마. 테니스 코트에서 남자들이 싸움을 시작합니다.누군가가 칼을 꺼내고, 도망치던 남자는 허벅지를 맞아 쓰러집니다. 피가 흐르자 지켜보던 사람들도 가담해 4명 대 4명이 맞붙는 패싸움으로 번지는데….이날 1명은 목숨을 잃고, 칼을 꺼냈던 남자는 죽을 때까지 도망자로 살게 됩니다. 도망자의 이름은 미켈란젤로 메리시, ‘카라바조’란 이름으로 유명세를 떨친 화가였습니다.이탈리아 법정 기록과 기사로 남겨진 이 사건으로 카라바조에겐 수백 년간 ‘광기의 화가’, ‘악마의 재능’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어떤 역사가는 그를 ‘그림 실력은 있었지만 높은 지성은 없었다’고 평가했죠. 카라바조는 정말 미친 재능을 감당하지 못한, 광기의 화가였을까요?야만의 시대, 17세기카라바조가 살인에 이르는 과정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가 목숨의 위협을 느껴 반격했다는 기록, 상대방도 칼을 꺼내 친구가 치명상을 입었다는 기록 등이 엇갈립니다.이외에 길거리나 식당에서 시비가 붙거나 경

1606년 어느 날 밤 이탈리아 로마. 테니스 코트에서 남자들이 싸움을 시작합니다. 누군가가 칼을 꺼내고, 도망치던 남자는 허벅지를 맞아 쓰러집니다. 피가 흐르자 지켜보던 사람들도 가담해 4명 대 4명이 맞붙는 패싸움으로 번지는데…. 이날 1명은 목숨을 잃고, 칼을 꺼냈던 남자는 죽을 때까지 도망자로 살게 됩니다. 도망자의 이름은 미켈란젤로 메리시, ‘카라바조’란 이름으로 유명화 화가였습니다. 이탈리아 법정 기록과 기사로 남겨진 이 사건으로 카라바조에겐 수백 년간 ‘광기의 화가’, ‘악마의 재능’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어떤 역사가는 그를 ‘그림 실력은 있었지만 높은 지성은 없었다’고 평가했죠. 카라바조는 정말 미친 재능을 감당하지 못한, 광기의 화가였을까요?야만의 시대, 17세기 카라바조가 살인에 이르는 과정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가 목숨의 위협을 느껴 반격했다는 기록, 상대방도 칼을 꺼내 친구가 치명상을 입었다는 기록 등이 엇갈립니다. 이 외에 길거리나 식당에서 시비가 붙거

화려한 무늬가 그려졌지만 갈색 톤으로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옷을 입은 여인. 벽돌로 된 바닥 위 의자에 앉아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습니다. 아래로 떨군 얼굴 위로는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그 옆으로는 조금 전 벗어 던진 듯한 장신구들이 널브러져 있습니다. 그녀는 아주 작은 나무 의자 위에 앉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남겨진 건 옷과 장신구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말이죠. 이 여인은 누구이고 그림 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이 그림은 초상화도, 정물화도 아닌 성경의 내용을 그린 종교화입니다. 그것

좋은 예술가를 만드는 조건은 무엇일까?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해오면 저는 ‘삶에 고난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고 자주 답을 했습니다.뛰어난 실력, 감각,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는 끈기 등 다른 여러 조건도 있지만, 결국 표현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이야기가 있어야, 작품도 깊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얼마 전 일본 도쿄에서 열린 루이스 부르주아의 대규모 회고전을 보고 생각을 조금 바꾸었습니다.굴곡진 삶이 좋은 예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살면서 느끼는 문제를 얼마나 정직하게, 깊이 받아들이는지가 더

전시장 입구부터 무겁고 커다란 철문들이 눈앞을 가로막습니다. 철거된 건물에서 가져온 6개 문짝은 모두 방화문입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도, 연기도 새어 나오지 못하도록 막았던 문이 서로 손을 맞잡은 듯 육각형으로 둘러싸고 있습니다. 나란히 세워진 문들을 따라 반대편으로 걸어가면 한 사람이 서 있을 만한 정도의 틈이 보입니다. 안이 잘 보이지 않던 철문 속에는 뭐가 있을까, 호기심을 잔뜩 안고 틈 앞에 서면 보이는 광경은….고독을 마주하는 감옥 제가 지금 묘사하는 작품은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루이스 부르주아(1911∼2010)의 ‘2번 죄인’(Culprit Number Two·1998년)입니다. ‘Culprit’이라는 제목을 단순하게 ‘죄인’이라고 번역했지만 좀 더 정확하게는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 책임자라는 뉘앙스에 더 가깝게 느껴졌는데요. 그 이유는 철문 속 펼쳐진 광경에 있습니다. 문틈 사이에 서면 조그마한 나무 의자와 얼굴이 겨우 보일 정도 크기의 동그란 거울이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를 보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의 벨베데레 궁을 찾는 여행객이 많습니다. 그런 클림트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길이 34m, 높이 2m에 달하는 대형 벽화가 있습니다. 베토벤 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를 토대로 한 ‘베토벤 프리즈’입니다. 1900년을 전후로 오스트리아 빈은 격동의 역사를 겪었습니다. 유럽 전역은 아카데미를 거부하고 바르비종, 인상파처럼 아방가르드 예술의 바람이 불었고, 그런 가운데 마지막까지 왕정을 유지했던 빈 사회는 탐미주의로 빠져들었죠. 땅 위로는 화려한 도시가, 그 밖에는 빈곤과 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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