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쓰히토(睦仁·연호는 메이지·明治) 일왕 조카의 장녀로 일본 왕족인 이 여사는 한때 히로히토(裕仁) 왕세자의 비(妃)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나 1920년 일본에 볼모로 와 있던 영친왕과 정략 결혼했다.
일본 육사 출신인 남편 영친왕은 일본 제1항공군 사령관으로 복무하다가 패전을 맞으면서 연합군에 재산을 몰수당하고 어렵게 살았다. 영친왕과 이 여사는 한국 국적이 회복된 이듬해인 1963년 한국 땅을 밟았다. 이후 영친왕은 오랜 투병 생활 끝에 1970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고 이 여사는 홀로 한국에 남아 장애인 봉사활동에 헌신하다 1989년 남편 곁으로 떠났다.

1시간 40분 분량의 이 오페라는 소녀 이방자가 1919년 신문에서 자신의 약혼 소식을 보고 충격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1920년 영친왕과 결혼한 후 이듬해 낳은 장남 진을 1922년 한국 방문 중 잃고 고통 받는 장면은 극중 하이라이트다. 전 씨는 “이 여사는 마지막까지 장남이 독살됐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조선 황실의 혈통을 끊기 위한 일제의 모략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여사는 1989년 만 88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남편 영친왕은 기록조차 거의 남기지 않았다. 전 씨는 “생전에 두 분이 마음 깊은 곳에 꼭꼭 가둬 뒀던 감정을 노래를 통해 풀어내려 했다. 적어도 오페라에서 두 분의 감정은 자유로워졌다. 넋이라도 달래질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오페라 초연에 대한 일본 각계의 관심은 뜨겁다. 주요 신문의 보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 여사의 일족인 일본 왕족들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전 씨는 전했다. 전 씨는 “‘이 여사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며 놀라는 일본 젊은 세대의 반응에 희망을 느끼고 있다”며 “일본 젊은 세대가 이 여사를 통해 멸망한 조선왕조와 한일 근현대사에도 눈을 뜬다면 서로에 대한 이해와 우호가 깊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 씨는 특히 ‘2개의 조국’이라는 오페라 마지막 아리아를 부를 때마다 가슴이 복받쳐 올라온다고 말했다. 남과 북, 한국과 일본이 교차하는 재일 코리안으로서의 정체성 때문일 것이다.
이 여사가 영친왕의 곁을 끝까지 지킨 것은 일왕의 칙령 때문은 아니었을지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 씨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그랬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 여사는 가장 어려운 시절에도 남편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그가 별세한 이후에도 약속대로 한국에 남았습니다. 진짜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들이죠. 정략 결혼에 희생되긴 했지만 두 분 사이에는 사랑이라는 ‘마음의 기적’이 일어났던 겁니다.”
전 씨는 “재일 코리안으로서 한일 간에도, 남북 간에도 ‘마음의 기적’이 일어나길 고대하고 있다”며 먼 곳을 바라봤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