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영]트럼프의 반지성주의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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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국제부 차장
이진영 국제부 차장
트럼프가 살아났다. ‘멕시코계 판사는 불공정하다’고 했다가 인종주의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기죽어 지내던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 12일 플로리다 주 올랜도 테러가 발생하자 “거봐, 내 말이 맞잖아” 하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트럼프의 발언 통로는 트위터다. 그는 900만 팔로어에게 “급진적 이슬람 테러에 대해 내가 옳았다고 축하해줘 고맙다”고 했다. 많이 죽고 많이 다쳤는데 ‘축하’라니. “올랜도에서 벌어진 일은 시작일 뿐”이라고 겁준 뒤 바로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민자를 막아야 한다니까.” 민주당 대선 후보 힐러리 클린턴을 겨냥해선 “우리 좀 안전해지자. 힐러리가 대통령 되면 큰일 난다”고, 눈엣가시였을 힐러리의 백기사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겐 “우리 리더십은 약하다”며 “사퇴하라”고 윽박질렀다.

미국판 ‘북풍(北風)’이라고 해야 할까. 9·11을 기억하는 미국 유권자들은 테러 공포에 흔들리고 있다. 그렇다고 보수당 후보에게 꼭 유리할 것 같진 않다. 트럼프가 입을 열수록 무지도 드러나고 있다. 그는 반(反)지성주의자다. 우치다 다쓰루의 신간 ‘반지성주의를 말하다’(이마)에는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나온다.

첫째, 근거 없는 얘기를 자신 있게 떠든다. 트럼프는 “올랜도 테러범이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쳤다고 한다”고 했다. 경찰도 목격자들도 이렇게 얘기한 사람은 아직 없다. 폭스뉴스에 나와선 “올랜도 난사범보다 더 흉악한 수천 명이 미국에 나돌아 다닌다”고 했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미국 내에 ‘외로운 늑대(자생적 테러범)’가 900명가량 된다고 발표한 적이 있을 뿐이다.

둘째, 분풀이 대상을 콕 집어 단정적으로 얘기한다. 트럼프는 “미국이 위험한 건 불법 이민자들 때문”이고, “미국이 가난한 건 중국이 돼지저금통 털듯 미국을 털어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게 다 유대인 때문이야’ ‘이게 다 ○○도 놈들 때문이야’ 하는 식이다. 물론 테러나 경제난 같은 복잡다단한 문제의 원인이 하나일 리 없고 이렇게 쉽게 풀릴 수도 없다.

셋째, 같은 표정으로 똑같은 문구를 무한 반복하는 인내력이다. 트럼프 하면 똑같은 슈트에 똑같은 헤어스타일, 특유의 입 모양과 제스처가 떠오른다. “무슬림은 위험하다” “장벽을 세우면 된다”는 말을 하고 또 한다. 새로운 어휘를 구사하거나 새 논리를 펴지 않는다. 실패로부터 배우는 게 없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특징을 관통하는 본질이 반(反)시간성이다. 지성이란 앎의 쇄신이다. 여기엔 시간이 필수다. 반지성주의자들은 시간이 지나면 거짓임이 들통날 얘기를 되풀이하면서 지금 눈앞의 상대를 압도하는 일에 열중한다. 그래서 반지성주의의 적(敵)은 시간이다.

장사꾼들에게 불황은 한몫 챙길 기회다. 기업인 출신 트럼프에겐 국가적 비극이 표를 끌어모을 정치적 찬스로 보이는 모양이다. 저널리스트 리처드 로비어는 저서 ‘상원의원 조 매카시’에서 매카시를 ‘공산주의라는 유전을 파내 석유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본 탐사꾼’이라고 했다. ‘공산주의’를 ‘반이민주의’로 바꾸면 이 정치적 투기꾼은 딱 트럼프다.

시절이 수상하면 매카시, 트럼프 같은 반지성주의자들이 혹세무민(惑世誣民)해온 것이 되풀이돼온 역사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소극(笑劇)으로. 여기에 마르쿠제는 한마디를 보탰다. “희극으로 반복되는 게 원래 비극보다 훨씬 끔찍할 수 있다”고. 역사는 미국에서만 반복되는 게 아니다.
 
이진영 국제부 차장 ecolee@donga.com
#트럼프#미국 대선#올랜도 테러#반지성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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