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형주]막 구운 빵처럼 따뜻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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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교육차별 딛고 수학사 새 장 연 뇌터
따뜻한 멘토링으로 제자들 존경 한몸에
요즘 학생들에게도 애정어린 관심을

박형주 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 아주대 석좌교수
박형주 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 아주대 석좌교수
예전에 버클리대 수학과의 여자 대학원생 모임은 ‘뇌터의 서클’로 불렸다. 무슨 뜻인지 모르다, 위대한 여성 수학자이자 멘토라 불린 에미 뇌터의 얘기를 한참 뒤에야 들었다.

유럽에서 여성의 대학 입학이 허용된 것은 오래되지 않는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19세기 중후반에 시작됐지만 독일 대학들은 1900년까지도 여성 불가의 원칙을 고수했다. 노벨상을 두 번 받은 퀴리 부인도 여성의 교육에 관대했던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야 과학자가 될 수 있었다.

19세기 말에 독일에서 태어난 뇌터는 현대 대수학의 건설에 지대하게 공헌했고, 대칭과 불변량에 대한 업적으로 물리학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당대의 학자들은 그녀를 가리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수학자였을 뿐 아니라 아마도 가장 위대한 여성 과학자 중 한 명이며, 퀴리 부인과 동격이라고 말했다.

뇌터의 수학적 재능은 일찍 발현되지 못해 최고의 업적은 모두 40세 이후에 이룬 것이고 학문적 절정기는 50세 때였다. 대부분의 주요 성취가 30대 초반에 이루어지는 수학 분야의 특성에 비추어 이례적이다. 이는 여성이 교육과 연구에서 배제되던 당시 독일의 사회 체제와 관계가 있다.

대학 입학이 불가능해 청강생 신분에 만족하던 뇌터는 시대가 바뀌어 입학이 허용되자 박사학위까지 받고 괴팅겐대에서 연구를 하게 됐다. 정식 임용이 불가능해 무급으로 강의와 연구를 했고, 가족의 재정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탓에 절약이 평생 몸에 배게 되었다. 뇌터의 멘토로서 그 재능을 아까워했던 당대 최고의 수학자 다비드 힐베르트는 그녀의 강사 임명을 주장하다 지금도 회자되는 유명한 발언을 남겼다. “이곳은 대학이지 공중목욕탕이 아니지 않소?”

이러한 성차별 관행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완화되어, 뇌터도 비전임 부교수로서 강의료를 받게 됐다. 연구 환경이 개선되자 학자로서의 성취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고 세계 수학계에서의 위상도 공고해졌다. 이때 나온 뇌터환(環) 개념은 지금은 대수학 교과서에 나온다. 재능 있는 젊은 학자에게 좋은 연구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이래서 중요하다.

학문적 명성은 확고해졌지만, 나치가 정권을 잡으면서 여타 유대인 학자와 마찬가지로 직장을 잃게 됐다. 뇌터의 안전과 직장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한 수학자들의 국제적 연대 덕분에, 록펠러재단의 지원을 받아 미국의 브린모어대로 옮길 수 있었다.

따뜻한 품성의 위대한 멘토였던 뇌터는 학생들과 교정을 산책하며 연구토론하는 것을 즐겨 했다. 첫 번째 박사학위 학생인 그레테 헤르만은 ‘학위지도 어머니(dissertation mother)’라며 지도교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현했는데, 동양에서 스승과 부모를 동일시하던 것과 다를 게 없다. 괴팅겐 시절의 동료였던 수학자 헤르만 바일은 그녀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막 구운 빵처럼 따뜻했다”라고 전한다.

뇌터의 멘토링 방식은 전설적이어서, 기념 성격의 ‘여학생 지원 프로그램’이 여럿 만들어졌다. 독일연구재단은 에미 뇌터 프로그램을 만들어 여성 박사후연구원(postdoc)들을 지원하며, 미국 여성수학자회에서는 매년 뛰어난 여성 수학자를 선정해 에미 뇌터 강연을 개최한다. 4년마다 열리는 세계수학자대회 기간에도 독보적인 여성 수학자가 강연하는 ICM 에미 뇌터 강연이 열린다.

과학기술 분야의 박사학위만 취득하면 평생직장을 구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요즘은 독자적인 연구자로 성장하기 위한 훈련의 시기를 거친다. 흔히 박사후연구원 과정이라고 불리는데, 특히 기초과학 분야의 인재들이 학위 과정 중에 체득하지 못한 최신 연구의 흐름을 접하고 독립된 연구자로 성장해 학계나 산업계로 진출하는 관문이 됐다. 하지만 박사후연구원은 법적으로는 비정규직으로 분류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분법이 만연한 우리나라 출연연구소에서는 젊은 연구자들에게 연구훈련의 기회를 제공하는 귀한 프로그램의 현상 유지도 어렵다. 연구훈련을 통한 인재 배출을 연구소의 두뇌 유출로 비난하는 몰이해가 난무한다.

우리 학생들과 젊은 연구자들의 삶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 시대의 변화를 이해하며 미래 세상에 그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박형주 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 아주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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