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당선]대통령의 딸… 22세 퍼스트레이디… 34년만에 다시 청와대로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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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가 걸어온 길 <上> 출생부터 정치입문 전까지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 이왕 공인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서기로….”(1974년 11월 10일 일기)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세상을 떠난 뒤 스물두 살의 박근혜가 쓴 일기는 그가 태어나 정치를 시작해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 주는 압축된 문장이다. 10대 대통령의 딸, 20대 퍼스트레이디, 30대 한 집안의 가장, 40대 국회의원, 50대 야당 대표, 60대 대선후보와 당선. 그는 현대사의 굴곡에 온몸을 던지며 살아 왔다.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잇달아 흉탄에 여읜 뒤 퍼스트레이디 역을 했던 청년기와 ‘박정희 지우기’에 저항해 왔던 음울한 중년을 거쳤다. 그 후 정치인으로서 보수 정당의 역사를 새로 쓴 과정은 박근혜 당선인에게 최대 정치적 자산이자 가장 높은 장애물이던 아버지 박정희를 극복해 오는 과정이었다. 그런 극복의 결과는 어린 시절 살던 청와대로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귀결됐다.

○ 승부욕 강한 아이

박 당선인은 1952년 2월 2일 경북 대구시 삼덕동(대구 중구 삼덕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정희는 나이 36세로 육군본부 작전교육차장이었고 주부였던 육 여사는 28세였다.

어린 박근혜는 군인이던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1958년 서울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조용하고 차분하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집요한 성격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학년 생활기록부엔 ‘온순, 침착한 성격, 무엇이든지 성실하게 해내며 실패를 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든 호감을 주는 학생이지만 특정한 친구들과만 노는 경향이 있다’라고 돼 있다.

이런 성격은 학업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동생 근령 씨는 어린 시절 박 당선자에 대해 “언니는 매우 모범적이고 착한 학생이었다. 모든 과목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려 했다. 수학이나 국어를 열심히 공부해 좋은 성적을 얻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언니의 경우는 체육 과목까지 열심히 공부해 좋은 성적을 얻으려 했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땐 공기놀이의 동네 챔피언이 되기 위해 동생 근령과 집에서 따로 공기놀이를 연습하기도 했고 고무줄놀이에서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숨을 참으며 깡충깡충 뛰기도 하는 승부욕이 강한 아이였다.

○ 5·16으로 바뀐 인생, 청와대로…

1961년 5월 15일 밤 10시, 서재에 있던 박정희 소장은 부인 육 여사를 보고 말했다. “그 가방 속에 권총 있지. 꺼내 줘요. 다녀올게.” 그때 박근혜의 나이 열 살이었다. 5·16은 한 군인의 인생만 바꾼 게 아니었다. 박근혜의 인생이 바뀐 첫 순간이기도 했다.

5·16군사정변과 1963년 대통령선거를 거쳐 박근혜는 아버지를 따라 청와대로 이사한다. 그는 “청와대에 도착한 순간 무엇보다도 엄청나게 넓은 정원에 압도됐다”라고 회고했다. 육 여사는 그가 장충초등학교를 다니기에는 너무 멀어 어머니(박근혜의 외할머니) 집에 맡기기로 했다. 대통령의 딸이라고 자동차로 데려다주고 데려오면 특권 의식이 생길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1964년 성심여중을 다닐 땐 1년 동안 기숙사 생활도 했다. 당시 생활기록부엔 ‘아버지의 기대’라는 항목에 1학년 땐 ‘피아니스트’, 2·3학년 땐 ‘교육자’로 돼 있다. 2학년 생활기록부엔 ‘너무 어른 같은 것이 결점’, 3학년 땐 ‘너무 신중해서일까, 과묵한 편’이라고 기재돼 있다.

성심여고를 졸업한 박근혜는 1970년 3월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육 여사는 가정과에 진학하기를 바랐지만 박 대통령이 친분이 있는 김완희 교수의 말을 하면서 전자공학과로 진학하기를 권했기 때문이다.

○ 고통과 도전, 정치사에 이름을 올리다

1974년 8월 15일. “어머니께 무슨 일이 생겼으니 빨리 하숙집으로 와야 한다.”

프랑스 그르노블대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중 친구들과 여행을 하고 있던 그에게 하숙집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급히 귀국길에 오른 그는 프랑스 공항에서 ‘암살’이라는 글자와 함께 어머니 사진이 크게 실린 신문을 보고 귀국 이유를 알았다. 그는 “수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고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라고 당시 심정을 표현했다.

스물두 살에 퍼스트레이디가 됐다. 그는 프랑스 유학 시절 언젠가 좋은 사람을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바람을 가졌지만 모두 물거품이 됐다. 그는 곧바로 걸스카우트 명예총재를 맡았고 새마을운동을 구체화한 새마음운동을 주도하며 퍼스트레이디 업무에 몰입했다. 그는 “어머니의 행적은 나에게 훌륭한 교과서가 됐다. 탁상행정을 몹시 싫어하셨던 어머니는 고되고 힘들더라도 직접 뛰어다니며 민원을 해결하셨다”라고 자서전에 썼다.

그즈음 그는 아버지와 국내 정치에 관해서도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1979년 김영삼 당시 국회의원이 제명된 것을 놓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어떻게 국회의원의 배지를 뗍니까? 아버지가 쌓아 올린 업적을 중앙정보부가 무너뜨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추궁했다고 한다.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면서 아버지를 따라 세계 각국의 정상과 지도자를 만났다. 이때 쌓은 국정·외교 경험은 훗날 그가 대통령에 도전할 때 자랑하는 중요한 이력이 됐다.

그러나 이런 도전의 기간은 길지 않았다. 1979년 10월 26일 아버지는 “오늘은 삽교천 행사에 간다”라며 아침에 청와대를 나섰다. 그날 저녁 TV를 통해 본 행사 장면에 대해 그는 “아버지의 안색이 유난히 하얗게 보여 이 세상 분이 아닌 것같이 느껴졌다. 아버지의 건강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회상했다.

다음 날 오전 1시 반 전화벨이 울렸다. 김계원 당시 비서실장은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그 순간 한 말은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는 질문이었다.

○ 고난과 수행으로 단련한 ‘잠적기’

그는 9일장을 치르고 난 뒤 청와대를 떠났다. 부모를 대신해 한 집안의 가장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18년간 고난의 세월이 시작된다. 그는 당시 “아버지가 심혈을 쏟아 온 이 나라, 이 사회를 위해 조그만 마음을 바치며 조용히 살겠다”라고 생각했다.

10년 뒤인 1989년 10월 26일. “묘소까지 가는 도중 마음의 울렁임을 참기 힘들었다. 추모사에서 ‘아버지!’ 하고 부르고 나면 감정이 폭발해 자제키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일기장에 담긴 것처럼 15만 명의 참배객이 몰려든 박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도행사는 그만큼 특별했다.

전두환 정권은 박 전 대통령의 흔적 지우기에 매진하며 추도식도 허용하지 않았다. 박근혜 남매는 아버지 기일이 되면 숨죽이며 제사를 지냈다. 박 전 대통령의 측근이던 이들은 전두환 정권의 눈에 들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부정부패의 온상이라는 비화들을 쏟아 냈다.

그는 홀로 아버지의 명예 회복에 애썼다. 1988년 박정희·육영수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박정희 일대기를 다룬 책과 영화를 제작했다. 그러나 시련의 연속이었다. 1980년 4월 영남학원 이사장에 올랐으나 교내 운동권의 반대로 7개월 만에 사퇴했다. 동생인 근령 씨와 갈등이 빚어져 육영재단 이사장도 사직했다.

그의 일기장을 보면 당시의 참담한 심정들이 담겨 있다. “너무나 고통이 잇달으니 심장이 감당을 못하는 것 같다.” “그런 생을 다시 살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도 모른다.” 그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어려웠던 시절, 견디기 힘들어 미치지 않고 살았던 게 기적이었던 시절, 타락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극복해 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고전 등 많은 책을 읽으면서 제 마음을 때리는 좋은 글귀를 적고 다시 읽어 보곤 했다”라고 회고했다. 1997년까지 계속된 이 고통과 시련의 음울한 시간이 ‘대통령 박근혜’를 만들기 위한 단련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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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열 기자 dnsp@donga.com
#박근혜#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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