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본 대지진 1년]<8·끝>다시 돌아본 그때 그곳 그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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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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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아사히신문 공동 기획전국서 몰려드는 자원봉사자… “센다이 호텔엔 빈방이 없어요”

지난해 3월 일본 이와테 현 오후나토 시내에 지진해일(쓰나미)이 몰려온 직후(위쪽)와 약 1년 뒤인 현재의 모습. 이가 왕창 빠져나간 듯 수많은 집이 사라졌다. 오후나토=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지난해 3월 일본 이와테 현 오후나토 시내에 지진해일(쓰나미)이 몰려온 직후(위쪽)와 약 1년 뒤인 현재의 모습. 이가 왕창 빠져나간 듯 수많은 집이 사라졌다. 오후나토=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정부는 부흥을 일으키겠다고 약속했지만 지금 어떤 부흥을 이뤘는지 잘 모르겠다.”

동일본 대지진 발생 직후 동아일보와 아사히신문이 공동 취재했던 후쿠시마(福島) 현, 센다이(仙臺) 시, 이와테(巖手) 현. 1년 전에 방문했던 지역들을 다시 찾아가 그때 만났던 주민들을 수소문해 만났더니 예외 없이 “정부의 대지진 복구 작업이 너무 느리다”며 불만을 쏟아 놓는다.

아직은 정부 주도의 부흥 흔적을 찾기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주민들까지 주저앉은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스스로 대지진의 상흔을 떨쳐내며 또다시 닥칠지 모르는 대재앙에 철저히 대비하려 애쓰고 있었다. 대지진 직후 동행 취재했던 아사히신문 시미즈 다이스케(淸水大輔·31) 기자와 함께 5∼7일 그때 그곳을 다시 둘러봤다.

○ 가시지 않은 공포… 후쿠시마

5일 오전 10시 8분 도쿄(東京) 역에서 후쿠시마행 신칸센에 몸을 실었다. 기차는 1시간 40분 만에 후쿠시마 역에 도착했다. 1년 전엔 철도가 폐쇄돼 승용차로 9시간을 달려야만 했던 길이다.

대형마트부터 둘러봤다. 후쿠시마산 과일과 채소를 모아 진열한 코너에는 ‘내 고장 음식을 먹읍시다’라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20분 동안 지켜봤다. ‘방사능 검사를 마쳤다’는 증명서와 대폭적인 가격 할인도 소용이 없었다. 후쿠시마 현 사과는 개당 50엔(약 700원)으로 개당 120엔(약 1600원)인 아오모리(靑森) 현 사과 가격의 절반에도 못 미쳤지만 후쿠시마산 농산물을 집어 드는 사람은 없었다.

후쿠시마 시 오모리(大森)에 사는 주부 다카하시 유키코(高橋由紀子·가명·40) 씨는 “방사능 검사를 통과한 농산물만 출하한다지만 믿을 수 없다. 지금은 나 자신만 믿는다”고 말했다. 다카하시 씨는 초등학교 3학년과 6학년인 아이들과 함께 이달 말 도쿄로 이사할 예정이다. 대지진 직후에는 후쿠시마에서 전학 온 아이들이 ‘후쿠시마산’이라고 불리며 이지메(집단따돌림) 당했지만 지금은 문제없을 것이라고 했다. 3학년인 아이의 같은 반 친구 40명 가운데 10명은 이미 후쿠시마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전학을 갔다.

후쿠시마 시내에는 여전히 공포감이 감돌고 있다. 대지진 직후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수많은 주민들 가운데 상당수가 후쿠시마를 떠났다는 게 현지 주민들의 얘기다.

○ 또 다른 지진 대비… 센다이

센다이 시 프린스호텔에 짐을 풀었다. 1년 전 취재 베이스캠프 삼아 묵었던 곳이다. 당시엔 난방이 되지 않아 외투를 껴입고 이불을 뒤집어써야 했고,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아 6층까지 걸어서 오르내려야 했다. 그랬던 프린스호텔이 지금은 내부 가구와 TV를 새것으로 교체하는 개·보수 작업에 한창이다. 호텔 직원은 지진 공포로 손님이 줄기는커녕 자원봉사자와 피해복구 작업자 덕분에 지난해 5월 이후 빈 객실이 없을 정도라고 귀띔했다.

이튿날인 6일 세노 유이코(瀨野結衣子·29·여) 씨에게 전화했다. 지난해 피난소에서 만났던 그는 도호쿠(東北)대 박사과정 학생이었는데 한국에서 취재 왔다는 얘기만 듣고서도 센다이 피해 현장 구석구석을 안내하는 친절을 베푼 바 있다.

박사논문을 완성하고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4월부터 규슈 가고시마(鹿兒島)에 있는 제약회사에서 일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는 “방사능은 어찌 손쓸 수 없기 때문에 잊고 산다. 하지만 집이 무너지는 것은 막고 싶다. 가고시마에선 반드시 콘크리트 집에서 지낼 것”이라고 말했다. 대지진 이후 일본에선 연안 주변의 고층 맨션 인기가 떨어졌고 내진설계가 잘된 단독주택이나 저층 공동주택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안전성’이 집을 고르는 핵심 기준으로 떠오른 것이다.

○ 안정을 찾아가는 주민들… 이와테

쓰나미 피해가 컸던 이와테 현 리쿠젠타카타(陸前高田)와 오후나토(大船渡)는 꼭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그 누구보다 간노 게이코(管野惠子·59·여) 씨 가족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간노 씨는 쓰나미로 마을 전체가 형체조차 없이 사라진 리쿠젠타카타 시에서 기적적으로 여섯 가족 모두가 무사히 살아남아 재회한 사연의 주인공이다. 그는 남편 및 시어머니와 함께 리쿠젠타카타 시영(市營)주택에서 살고 있다. 방 1개에 거실 겸 부엌, 욕실이 있는 40m²(약 12평) 규모였다. 나머지 가족 3명은 승용차로 20분 거리인 오후나토 시의 가설주택에 살고 있다. 시영주택이 좁아 가족이 생이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기자가 7일 간노 씨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장이 막혀 소화를 못 시켜서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시어머니인 간노 도키에(管野トキエ·88) 씨가 반겨주었다. 시어머니는 “지진 때 휴대전화 하나 달랑 들고 나왔지만 동생들이 옷과 가전제품을 보내줬다”고 말했다. 대지진 이후 일본에서는 가족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일벌레였던 사람들이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고 친척에게 연락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병원으로 찾아간 기자를 본 간노 씨는 눈물을 글썽였다. 간노 씨 가족의 생활도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보육사였던 간노 씨는 59세임에도 불구하고 보육원 수십 곳에 이력서를 내 계약직 일자리를 구했다. 남편인 간노 유키오(管野幸男·59) 씨도 건설회사의 계약직으로 고용됐다. 동북지역에서 건설작업이 본격화되면 남편의 수입이 좀 늘어날 것으로 기대했다.

간노 씨는 “정부의 부흥작업은 기대보다 느리지만 점점 나아질 것이다. 꼭 리쿠젠타카타에 다시 와 부흥된 모습을 봐 달라”고 말했다. 그의 바람이 현실로 이뤄지길 간절히 빌며 도쿄로 돌아오는 신칸센을 탔다.

후쿠시마·센다이·나토리·리쿠젠타카타  
오후나토=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 공동취재 아사히 시미즈 기자
“폐허 딛고 희망 일구는 일본을 응원해주세요”


‘다시 한 번 피해지를 방문했을 때는 희망으로 가득 차 웃고 있는 얼굴을 기사화합시다.’

지난해 동일본 대지진 발생 직후 동아일보 박형준 기자와 공동 취재할 때 나는 이 같은 약속을 했다. 실제로 1년 만에 박 기자와 다시 만나 피해지를 방문할 수 있어 정말 기뻤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희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후쿠시마 현 농산물직판장 점장인 아카마 하쓰에(赤間初江·여) 씨는 “방사능 검사를 끝낸 안전한 농산물만 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박 기자가 “1년이 지났으니 어느 정도 희망이 싹트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라고 말하자 아카마 씨는 “희망을 가져야겠지만 10년 후에나 가능할지 모르겠다”며 씁쓸하게 말했다.

아카마 씨가 말한 것처럼 피해지 복구는 진도가 느리고 전망도 불확실하다. 나는 작년 박 기자와 헤어진 후 4월과 10월 두 번에 걸쳐 약 30일간 피해지를 다시 방문했다. 후쿠시마 현에서 소를 키우는 한 농부는 “송아지를 팔 수 있게 됐지만 가격은 엄청 떨어졌다”고 탄식했다. 같은 현 내의 가설주택에 피난한 한 남성은 “아무리 방사능수치가 낮아졌다고 해도 아이들이 있는 가정은 다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부흥. 나를 포함해 일본 언론이 즐겨 사용하는 이 단어는 피해지의 주민들에게는 아직 딴 세상의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박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말이 있다. “만약 한국에서 동일본 대지진과 같은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면 일본보다 훨씬 빨리 복구됐을 겁니다.” 정보기술(IT) 산업, 영어교육, 영화 가요 등 예술문화 발전에서 볼 수 있듯 한국은 방향이 설정되면 단번에 움직인다. 그런 한국의 힘에 종종 놀라곤 한다. 반면 일본은 여당과 야당이 서로 발목을 잡고 있다. 대지진 폐기물 처리조차 끝내지 못했으며 주택과 인프라 재건도 지지부진하다. 이런 일본의 상황은 한국인에게는 안타까워 보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만 알아줬으면 한다. 그런 일본에도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고자 발버둥치고 싸워가며 성실히 일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는 것을.

동아일보 2011년 3월 21일자 A6면.
동아일보 2011년 3월 21일자 A6면.
이번에 박 기자와 함께 리쿠젠타카타 시의 간노 게이코 씨를 다시 만났다. 시내는 텅 비었고 간노 씨를 포함해 주민들은 고지대 아파트나 가설주택에서 비좁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래도 간노 씨 가족은 각자 일을 다시 하며 밝게 살아가고 있었다. 간노 씨는 다시 방문해 준 박 기자에게 “새로 아들이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동아일보는 쓰나미가 몰려올 때 피난 방송을 계속하다 결국 목숨을 잃은 여성을 소개했다. 원전 사고가 일어난 위험한 국가와 피해지에는 한 측면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삶의 방식, 인간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대지진 이후 일본인의 삶과 사고방식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살펴보고 싶다.” 박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부디 한국 독자 여러분도 일본이 일어서고자 노력하는 변화상을 지켜봐 주시길 바란다.아사히신문 사회부

시미즈 다이스케(淸水大輔) 기자 shimizu-d@asah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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