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韓日 역사의 아픔 넘은 우정… 친구야, 오늘도 함께 꿈꾸자”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0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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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때 첫 만남… 41년 만에 재회… 이후 25년 교류 나일성 교수-사카에 PD

6일 일본 요코하마의 가나가와 방송국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나일성 연세대 명예교수(오른쪽)와 사카에 다다시 PD. 시라이시 시게타카 씨(천체사진가) 제공
6일 일본 요코하마의 가나가와 방송국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나일성 연세대 명예교수(오른쪽)와 사카에 다다시 PD. 시라이시 시게타카 씨(천체사진가) 제공
“한국에서 나일성이란 분이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나일성? 그런 사람 모릅니다.”

“1945년 한반도에서 함께 중학교에 다녔던 친구라고 하던데요.”

“그때 한반도에서 중학교에 다닌 것은 맞지만, 나일성은 모릅니다.”

1986년 4월.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가나가와 방송국의 PD 사카에 다다시(寒河江正) 씨는 천문학자 히라이 마사노리(平井正則) 씨의 전화를 받았다. 나일성은 물론이고 히라이 씨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전화를 끊은 뒤 살짝 겁이 났다. ‘낯선 한국인이 왜 나를 찾을까. 내가 그때 한국인에게 무슨 나쁜 짓을 한 거라도 있나….’

○ 조선말 쓰던 친구 감싸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4월. 열세 살 소년 사카에는 지금은 북한 땅이 된 성진(지금의 김책시)에 있는 성진중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생 60명은 일본 군대식으로 4개 분대로 편성됐다. 사카에는 키가 작고 내성적이었다. 그런 사카에가 친구로 삼고 싶은 소년이 있었다. 키가 비슷한 한국아이였다. 하지만 그 애는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당시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이 심하던 때였다. 서로 사는 구역도 달랐다. 사카에가 도립병원 원장의 아들로 ‘잘나가는’ 집안이었던 것도 한국아이들에게 거리감을 줬다.

나일성 명예교수의 부인 이순희 씨(오른쪽)와 사카에 다다시 PD의 부인 마스미 씨. 시라이시 시게타카 씨 제공
나일성 명예교수의 부인 이순희 씨(오른쪽)와 사카에 다다시 PD의 부인 마스미 씨. 시라이시 시게타카 씨 제공
하루는 한국인 학생 2명이 싸움을 벌였다. 그걸 본 다른 한국아이가 둘을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는 “조선 사람끼리 싸우면 어떻게 하느냐”며 한국말로 야단을 쳤다. 사카에가 친구삼고 싶어 하던 아이였다. 그러자 이를 엿들은 한 일본인 아이가 “너 지금 조선말 했지? 우리 아버지한테 일러바친다”고 겁을 줬다. 그 애 아버지는 이 학교 교무주임이었다.

사카에가 나섰다. “조선사람이 조선말 하는 게 뭐가 나쁘냐.” 분대장 사카에의 말에 기세등등하던 일본인 아이는 잠잠해졌다.

그렇게 두 아이는 친구가 됐다. 그 아이의 한국 이름이 나일성이었다. 둘은 등하굣길에 늘 붙어 다녔다. 사카에는 나일성의 집으로 곧잘 놀러왔다. 당시로선 드문 일이었다. 나일성은 사카에의 집으로 놀러간 기억이 없다. 어린 나이였지만 번듯한 일본인 친구의 집으로 놀러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조선말 하다 걸리면 혼쭐나던 시대였어요. 꼼짝없이 정학을 당할 판이었지요. 사카에가 일본 친구 앞에서 나를 변호한 것은 대단한 용기였지요. 참, 당시 사카에의 아버지도 한국 사람들을 진료할 때면 한국말을 쓰곤 했어요. 당시로선 엄청난 일이었지요.” 나일성은 한국말에 얽힌 사카에 부자의 기억을 60년이 넘도록 잊지 않고 있다.

○ 41년 만의 재회

“한국에 갑시다. 내 친구 나일성을 만나러 같이 갑시다.”

창씨 개명한 일본식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열세살 때 친구의 한국 이름이 나일성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사카에는 곧바로 부인에게 한국행을 통보했다. 얼른 만나고 싶었다. 나일성에게는 비행기편만 알려주고 무작정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7일 일본 요코하마 뉴그랜드호텔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대화하고 있는 사카에 다다시 PD와 나일성 연세대 명예교수.
7일 일본 요코하마 뉴그랜드호텔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대화하고 있는 사카에 다다시 PD와 나일성 연세대 명예교수.
1986년 여름 김포공항. 사카에 부부는 공항에 내렸다. 41년 만에 다시 밟은 한국 땅이었다. ‘나일성이 내 얼굴을 알아볼까.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불안했다. 하필이면 이날 나일성은 이런저런 일이 꼬여 김포공항에 늦게 도착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공항에 나일성이 나타나지 않자 사카에 부인은 남편을 나무랐다. “그냥 안부나 물어보는 정도로 찾았을 텐데, 이렇게 덜컥 한국에 올 것까지는 없잖아요. 사실상 처음 보는 거나 마찬가진데, 얼굴도 기억 못하면서 약속 장소도 안 정하고 연락처도 없이….” “안 나오면 그냥 서울여행 온 셈 치고 며칠 놀다 갑시다.” 사카에 부부는 서울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공항 대합실을 빠져나왔다.

나일성이 허겁지겁 공항으로 들어서던 순간, 저 멀리서 빠져나오는 중년 부부가 보였다. 한눈에 옛 친구임을 직감했다. 사카에도 멀리서 달려오는 나일성을 바로 알아봤다. 힘껏 껴안았다. 41년 만의 재회. 식민지시대 단짝 친구는 이렇게 다시 만났다.

○ 서로 다른 길

1945년 두 소년의 우정은 4개월 만에 끝이 났다.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고 사카에가 가족과 함께 황망히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8월 어느 날 사카에는 소련군의 감시망을 피해 밀항선에 몸을 싣느라 나일성과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험한 파도와 싸우며 주문진에 도착한 그는 미군의 임시수용소에서 몇 달을 보낸 후 후쿠오카를 거쳐 아버지의 고향인 센다이에 정착했다. 음악을 좋아한 사카에는 1953년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하자마자 합창부에 들어갔다. 졸업하고 방송국 PD가 된 후에도 OB합창단인 ‘클로버 클럽’에서 계속 활동했다.

나일성의 가족은 광복 직후 북한에 들어선 공산당 정권이 두려웠다.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목재 사업을 하던 나일성의 부친은 집과 재산을 버린 채 고향을 떠났다. 1946년 4월 서울에 정착한 나일성은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를 지나 천문학자가 됐다.

나일성은 1980년대 초부터 일본 출장이 잦았다. 일본에 갈 때마다 지인들에게 사카에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30년이 넘도록 만나지 못한 친구를, 그것도 한자도 모르고 ‘사카에’란 발음 하나만으로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히라이 교수와 나일성은 사카에의 부친이 의사였다는 점을 떠올리고 일본의사협회 명부를 뒤졌다. 어렵사리 부친의 이름을 찾았으나 돌아가신 뒤였다. 마침 그의 장남, 사카에의 형이 의사였다. 형을 통해 사카에에게 마침내 연락이 닿았다.

41년 만에 친구를 찾는다는 전화를 받은 사카에가 나일성의 이름을 몰랐던 것은, 당시 소년 나일성이 일본 이름을 썼기 때문이다. 당시 창씨개명 또한 시대의 아픔이었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힘겨웠던 시절을 용케도 지나온 두 친구. 한 사람은 방송국 PD로, 한 사람은 천문학자로 치열하게 살면서 서로를 잊고 지냈지만 감수성이 풍부한 소년시절 두 아이의 가슴에 새겨진 순수한 우정의 채도는 전혀 변색되지 않았던 것이다.

○ 음악을 통한 한일교류

1986년 재회 이후 두 친구는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옛정을 이어갔다. 백발이 희끗희끗한 중년이 됐지만 중학생 때의 우정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이들의 아름다운 우정에 감동한 도시샤대 OB합창단 ‘클로버 클럽’이 한일교류에 힘을 보태겠다고 나섰다.

1998년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클로버 클럽의 첫 서울공연이 열렸다. 60, 70대가 대부분인 합창단원은 연미복을 차려입고 새문안교회 여성 성가대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교회당 1000여 석이 가득 찼다. 텅 빈 객석을 각오하고 왔던 합창단원들은 감격했다. 당시 클로버 클럽 뉴스레터의 편집후기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때마침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국빈방문하고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일한(한일) 파트너십 선언’이 발표됐다. 한국이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나일성과 사카에의 우정을 통해 민간외교의 중요성을 배웠다.”

공연을 마치고 클로버 클럽은 바로 일본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가족을 동반한 사카에만 며칠 더 묵으면서 나일성이 천문박물관을 지을 예정이던 경북 예천군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그러자 단원들이 하나둘 “나도 남겠다”고 손을 들었다. 급한 일이 있는 몇 사람을 빼고 23명이 예천을 찾았다. 나일성은 이들과 함께 고찰 용문사와 이씨 종가를 견학하고, 한복을 차려입은 예천다도회 회원들은 일본 손님들에게 한국 차를 대접했다.

이듬해(1999년) 예천에 나일성천문관이 문을 열었고 클로버 클럽은 다시 예천을 찾았다. 이번엔 현지 예모 여성합창단과 합동공연을 했다. 연미복 차림의 일본인 노신사들과 한복으로 단장한 한국 여성들이 헨델의 ‘메시아’를 합창했다.

클로버 클럽은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은 지난해 서울 국립극장에서 다섯 번째 한국 공연을 가졌다. ‘화합과 평화’를 주제로 한 공연은 1000여 개의 객석이 가득 차 성황리에 마쳤다.

내년에는 나일성이 소속된 배재아펜젤러 합창단과 클로버 클럽이 합동공연을 갖기로 했다. 수익금은 동일본 대지진 피해지역에 기부할 계획이다. 화려하지도 요란하지도 않지만, 열세 살 소년의 우정은 시대를 건너뛰어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쉼 없이 한일교류를 살지게 하고 있다.

○ 세대를 잇는 우정

사카에는 3년 전 딸과 고등학생 손자까지 데리고 서울에 왔다. “우리의 우정, 한일 바로 알기는 다음 세대까지 이어져야 한다”면서. 덕수궁과 경복궁, 고궁박물관 등을 나일성과 함께 둘러보며 한국을 느꼈다. 사카에의 형제들이 나일성 부부를 일본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이들은 지난해 서로의 잔잔한 대화를 담은 책을 펴냈다. ‘너와 나, 그때 우리는 열세 살 소년이었다.’ 지난달에는 일본어판 책이 나왔다. 두 소년의 첫 만남과 우정, 성장을 담담하게 따라가다 보면 한일 근현대사의 고단한 역사와 시대의 아픔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달 초엔 요코하마에서 일본어판 출판기념회 겸 한일교류의 밤이 열렸다. 이들의 우정에 감동한 가나가와 방송국 측에서 행사를 마련한 것이다. 이 자리에도 클로버 클럽의 노신사 20여 명이 어김없이 등장해 한국어와 일본어로 축가를 불렀다.

마지막으로 사카에가 마이크를 잡았다. “내 친구 나일성은 천문학을 통해, 나는 전파를 통해 하늘로 꿈을 쏘아 올린다. 우리의 우정은 늘 같은 곳을 지향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도쿄=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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