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국가폭력이 휩쓴 뒤… 고삐리, 어른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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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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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나라/한창훈 지음/276쪽·1만1000원·문학동네

폭력을 말한다. 아버지가 휘두르는 가정폭력, 학교에서 이뤄지는 학원폭력, 그리고 국가에 의한 폭력이다. 그 가운데 가장 처절한 것은 국가 폭력이다. 전남 여수에서 중학교를 나와 고교를 광주에서 다닌 작가는 까까머리 고교생 때 5·18민주화운동을 겪었다. 도시락을 나눠 먹던 급우를 하루아침에 싸늘한 시체로 대면해야 했던 섬뜩한 기억이다.

1990년 등단한 뒤 바다와 섬을 배경으로 한 민초들의 삶을 비릿한 바다 냄새 가득하게 그려왔던 작가는 민주화운동을 직접 체험했지만 이를 다룬 장편을 여태껏 낸 적이 없다가 이번에 처음 1980년 광주를 정면으로 다뤘다. “광주 얘기는 많은 작가들이 기록하고 소설로 써왔다. 그래서 ‘나는 안 해도 되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 그런 작품들을 보기 힘들어졌다.” 그가 뒤늦게 광주의 기억을 풀어놓은 이유다.

1980년 광주에서 고교를 다니며 5·18민주화운동을 겪은 소설가 한창훈 씨. “무한경쟁 속에 놓인 요즘 젊은이들은 또 다른 폭력 아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문학동네 제공
1980년 광주에서 고교를 다니며 5·18민주화운동을 겪은 소설가 한창훈 씨. “무한경쟁 속에 놓인 요즘 젊은이들은 또 다른 폭력 아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문학동네 제공
작은 항구에서 중학교를 나온 ‘나’는 인근 지방 도시의 고교에 입학한다. 이 학교는 아이들이 서클을 만들어 서로 패싸움을 하고, 교사들은 각목으로 아이들을 두들겨 패는 정글 같은 곳이다. ‘나’는 힘과 깡을 기르기 위해 정권(正拳) 지르기를 연습하고, 상대를 제압하는 눈싸움 연습을 한다. 실력을 인정받아 학교 폭력서클에 들어가고, 점차 세상에 눈을 뜰 무렵 일상을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태풍과도 같은 ‘국가 폭력’(5·18민주화운동)을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1, 2부로 나뉜 작품은 주인공 ‘나’의 고교 생활이 펼쳐지는 전반부는 희극으로, 본격적인 시위가 이뤄지는 후반부는 비극으로 그려진다. 자취방에서 라면을 함께 끓여먹고 구형 라디오로 함께 음악을 듣던 살가웠던 친구 등이 때로는 주검으로, 때로는 열혈 시위대로 눈앞에 등장하면서 ‘나’는 혼란스럽다.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하던 그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하루아침에 폐허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어느새 어른이 된 것을 느낀다. 사랑하던 것들을 잃어버린 공허감이 폐부 가득히 밀려오면서다. 책장을 덮으면 그 상실감이 전해져 애잔하다.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쓰디쓴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 싶어진다.

글에는 광주도, 5·18이란 단어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대통령 서거나 군부 집권 등의 배경으로 쉽게 1980년 광주를 떠올릴 수 있다.

시외전화를 걸기 위해 전신전화국에 가고, 밥에 마가린과 간장을 넣고 비벼 먹어 한 끼를 때우고, 사창가를 다녀온 뒤 마이신 한 알을 빼놓지 않고 먹는 30여 년 전 청춘들의 모습이 그들의 추억담처럼 펼쳐진다. 하지만 문득문득 영화 ‘친구’나 ‘말죽거리 잔혹사’가 떠올라 기시감이 들기도 한다. 특히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로 촘촘히 채워졌던 전반부에 비해 후반에 펼쳐진 5·18민주화운동은 폭력적 상황들에 대한 묘사에 지나치게 몰두해 헐거운 느낌을 준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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