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5·16 50년]임채정 前국회의장이 말하는 ‘5·16과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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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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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었던 임채정 前의장
“4·19혁명 1년 만에 ‘민주 싹’ 잘라 경제발전만으로 정당성 부여 안돼”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50년이 지났지만 5·16군사정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여전히 엇갈린다. 혁명이냐 쿠데타냐는 사건의 정의부터 5·16 이후 태동한 군사정부의 정치·경제·사회적 공과에 이르기까지 5·16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긴 유산은 아직까지 현재진행형으로 한국의 정치지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동아일보는 두 원로 정치인 이만섭, 임채정 전 국회의장의 증언과 평가를 통해 5·16과 박정희 시대를 둘러싼 주요 논점을 되짚어봤다. 》
임채정 전 국회의장은 대학 2학년 때 5·16군사정변을 경험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 언론자유를 외치다 해직당했고 재야운동에 투신했다. 정권 말기엔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5·16에 대한 그의 평가는 단호했다. 그는 “4·19혁명으로 촉발된 민주주의의 싹을 자른 사건”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우리 국민에게 긍지나 희망을 갖다준 사건이 아니지 않느냐. 박정희 정권이 경제발전에 기여했다고 해서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태도가 용인돼선 절대로 안 된다”고 강조했다.

―5·16 당시 대학생이었다. 어떻게 5·16 소식을 접했나.

“하숙집에서 학교로 가는 길에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은인자중하던 군부가 행동을 개시했다’는 내용으로 기억된다. 황당한 느낌이었다.” (실제 방송은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미명(今朝未明)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대학가에선 5·16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그때 ‘은인자중’이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쓰였다. ‘은인자중하던 친구들이 일어났다’는 식이었다. 당시 대학가에선 군부는 이승만 독재 권력과 연결돼 있었다고 봤다. 그래서 ‘은인자중’이란 표현 자체가 우스갯소리처럼 들렸던 것이다. 그러나 군부가 정권을 잡을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 후진국에서 쿠데타가 많았으니 ‘우리도 겪는구나’라고 생각하는 정도였다.”

―5·16 주체인 박정희 소장은 알려진 인물이었나.

“아무도 몰랐다. 다들 ‘대체 박정희가 누구냐’고 했다. 당시는 군 지휘관들이 사회적으로 알려지는 시대도 아니었고…. 당시 육사를 나온 청년 장교들이 미국 유학을 많이 갈 때였다. 부분적으로는 선진지식이 있는 집단이었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국가를 운영할 만한 대안세력이나 유능한 집단은 아니었다.”

―5·16은 4·19 이듬해 일어났다. 당시 무능한 장면 내각이 상대적으로 엘리트였던 군부의 쿠데타를 불렀다는 평가가 있다.

“장면 내각을 무능했다고만 하는 것은 대단히 부당하다. 모든 것엔 공과가 있지 않나. 이승만 정권의 오랜 독재가 4·19라는 국민의 궐기로 종식됐다는 것은 엄청난 정치적 격동을 의미한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모든 것이 마치 준비된 듯 착착 진행될 수 있겠느냐. 물론 장면 내각은 상당한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4·19로 촉발된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역량을 고려해볼 때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다면 분명히 긍정적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았다. 과도정부의 1년을 가지고 군사쿠데타의 합리성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과도하다.”

―5·16과 유신으로 대변되는 권위주의 정치체제가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뤄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런 주장이 성립하려면 과연 권위주의가 경제개발에 유리한 것이냐, 과연 민주발전론은 경제개발에 비효율적인 것이냐에 대한 답이 나와야 한다. 물론 박정희 정권하에서 이룬 경제발전은 부분적으로 평가할 부분이 있다고는 본다. 그러나 독재, 억압, 특권경제, 정경유착, 부정부패, 각종 차별과 지역 불균형 등 부작용이 너무나 많이 양산됐다. 이런 부작용을 제쳐놓고 극히 부분적인 경제발전 딱 한 가지를 끄집어내 5·16을 미화하고 합리화하고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태도는 참으로 잘못됐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이야기라고 얘기한다.

“물론 역사는 승자의 역할을 주로 기술한 것이다. 그러나 승자의 역사라고 해서 그것이 정당했는가 하는 점은 생각해봐야 한다. 가령 동학혁명은 실패했다. 그렇다면 역사가 아닌가. 또 일제강점은 성공한 것이니 인정해야 한다는 것인가. 5·16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야 할 근거가 없다. 오히려 (요즘의) 재평가 움직임은 보수세력 결집을 위한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본다.”

―5·16과 박정희 정권은 개인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나.

“내 삶이 피폐해지고 뒤틀렸다. 혹독한 고문, 두 번에 걸친 감옥생활, 연금, 수배…. 생활이 파탄나 버스 탈 돈이 없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나은 편이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온 국민의 고통이었다. 어느 시인은 군사독재하의 삶을 ‘차라리 죽음’이라고 절규했지 않느냐.”

―9월엔 ‘박정희기념관’이 완공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역사와의 화해’ 차원에서 건립을 추진한 것인데….

“박정희 정권에 대한 평가라기보다는 박정희 정권으로 인한 갈등과 불화를 사회적으로 마감하자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임채정 前의장


― 1941년 전남 나주 출생
― 1964년 고려대 법대 졸업
― 1992년 14대 국회의원(서울 노원을) 15, 16, 17대 의원(4선)
― 2005년 열린우리당 당의장
― 2006년 17대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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