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서홍관]어머니, 그리고 ‘귓밥의 추억’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5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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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홍관 국립암센터 의사·시인
서홍관 국립암센터 의사·시인
어머니는 4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날 새벽 2시였던가. 따르릉 울리는 심야의 전화벨 소리는 나를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큰형이었다. “어머니 돌아가셨다.”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렇게 두려워하던 일이 천둥처럼 찾아온 것이었다.

언제부턴가 밤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를 두려워했고 외국에 나갈 때마다 불안했다. 한번은 외국에 나갔다가 귀국하는 캄캄한 비행기 속에서 어머니 생각에 혼자 담요를 둘러쓰고 운 적도 있다. 어머니 같으면 내가 아파 병실에 누워 있다면 누가 아무리 좋은 곳을 구경 가자고 해도 내 병실을 지켜주셨을 텐데 어머니가 요양병원에 누워 계신데도 나는 잘만 돌아다닌다는 생각이 나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1921년 호남평야의 만경강 옆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외할아버지께서 딸의 교육에 관심이 없으셨기 때문에 어머니는 학교에 입학도 못하셨고, 어찌어찌 한글만 익히셨다. 스무 살에 아버지와 선을 봐서 결혼하셨는데 아버지는 잠시 금융조합에 취직하셨지만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나와 전주에서 비누장사를 하셨지만 곧 망했고, 장기간 실업자 신세에서 헤어나지 못하셨다. 나는 어릴 때 자전거를 몰고 회사로 출퇴근하는 친구 아버지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하숙… 농삿일… 母情의 세월

우리 집안의 역사는 고스란히 어머니의 땀과 눈물이었다. 어머니는 그 긴 세월을 친척들 대상으로 하숙도 치고, 시골을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농사를 도와주고 농작물을 얻어 오셨다. 어머니는 시골로 일하러 가실 때 가끔 나를 데리고 가셨다. 시내버스를 타고 내려서 붉은 황톳길을 한참 걸어야 했는데 옥색 한복에 양산을 들고 가시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머니는 일하러 가셨지만 나는 소풍 가는 기분이어서 항상 들떠 있었다. 어머니는 친척집에 도착하면 작업복인 ‘몸뻬’로 갈아입고 종일 일하셨다. 해가 기울 때 일한 대가로 고구마와 배추와 파를 주면 작은 손이나마 없는 것보다는 나았기 때문에 그것을 들고 나르는 게 나의 임무였다. 가끔 맘씨 좋은 아저씨가 자전거로 날라주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버스를 타면 나는 졸기 일쑤였고 어머니는 “홍관아, 집에 다 왔다”며 깨워주셨고 나도 허겁지겁 짐을 들고 버스를 내려야 했다. 집에 도착하면 어머니는 그때부터 저녁밥을 짓느라 분주하셨고 그날 밤은 늦게까지 불빛에 배추나 파를 다듬으셨다.

어머니는 친척 대상으로 하숙을 쳤기 때문에 매일 도시락을 열 개씩 싸야 했고,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매일 남부시장까지 가서 장을 봐야 했는데도 방안과 마루를 반들반들하게 닦아 놓으셨다. 가끔 일요일 같은 때 마루에서 어머니는 손톱과 발톱을 깎아주었고, 어머니 무릎을 베도록 하고 귓밥을 파주었다. 그때 등에는 따스한 햇살이 비쳤고 얼마나 간질간질하고 기분이 좋은지 귓밥이 조금씩 계속 나왔으면 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여름에는 여름대로 산에서 종일 뛰어놀고 겨울에는 겨울대로 칼싸움과 불장난과 스키와 눈싸움에 신났다. 겨울에 벙어리장갑을 끼고 나갔다가 돌아오면 나는 흙과 눈으로 범벅이 된 장갑을 슬쩍 벗어놓고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다음 날 내 장갑은 어김없이 깨끗하게 빨아져서 부뚜막 옆에 뽀송하게 말라 있었다.

형제들은 어머니의 고통을 다 알고 성장했기에 모두들 크면 어머니에게 잘 해드리자고 결심하면서 자랐다. 한번은 어머니날 행사로 어머니 얼굴을 그려 오라는 숙제가 있었는데 셋째 형이 훌륭한 분은 얼굴 뒤에 후광을 그려야 한다고 해서 나도 어머니 얼굴 뒤에 부처님처럼 후광을 그려서 제출한 적도 있다. 그 그림은 교실 뒤에 한 달인가 걸려 있었다.

그렇게 건강하시고 부지런하시던 어머니의 몸이 한 해, 두 해 태산이 무너지듯 가라앉다가 드디어 4년 전에 돌아가셨다. 친척과 친구, 지인들의 조문을 받으면서도 어떻게 슬퍼해야 할지 모를 기분이었다. 정말 돌아가셨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입관식을 할 때 마지막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어머니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드렸다. 어머니 얼굴을 내 손으로 따스하게 해드리면 다시 눈을 뜨고 살아나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끝내 돌아오지 않으셨다.

당신은 내 인생의 첫번째 행운

하관을 하는데 흙을 관 위로 붓는 소리가 태산이 무너지는 소리로 들렸다. 어머니는 영정 속에서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시는 듯 환하게 웃고 계셨다. 눈을 잠시 감았는데 겨울 햇살이 내 눈에 쏟아졌다. 갑자기 어머니가 내 귓밥을 긁어주시던 완산동의 마루가 생각났다. 그제야 나는 확연하게 깨닫는 게 있었다.

그래요, 어머니와 함께 지낸 세월은 행복했어요. 어머니, 제가 어머니와 같이 살았던 시간이 좋았던 것처럼 어머니도 제가 아들이었던 것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죠? 제가 말씀드렸던가요? 어머니를 어머니로 만난 것이 내 인생의 첫 번째 행운이었다고. 그런데 어머니, 이렇게 좋은 이야기를 쓰는데 왜 지금까지 계속 눈물이 나는 거죠?

서홍관 국립암센터 의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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