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소통]창암 이삼만 ‘물처럼 바람처럼’ 전-허회태 ‘이모그래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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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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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열고 가는 길 붓 한자루면 어떠랴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이 조선 후기 서예가 창암 이삼만의 예술세계를 조명한 ‘창암 이삼만―물처럼 바람처럼’전을 통해 선보인 현판 ‘臨池觀月(임지관월)’. 마치 노래하고 춤추듯 얽매임이 없는 유수체의 글씨 미학을 확인할 수 있다. 문구는 ‘연못에 다다라 달을 구경한다’는 뜻이다. 사진 제공 서울 예술의전당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이 조선 후기 서예가 창암 이삼만의 예술세계를 조명한 ‘창암 이삼만―물처럼 바람처럼’전을 통해 선보인 현판 ‘臨池觀月(임지관월)’. 마치 노래하고 춤추듯 얽매임이 없는 유수체의 글씨 미학을 확인할 수 있다. 문구는 ‘연못에 다다라 달을 구경한다’는 뜻이다. 사진 제공 서울 예술의전당
양반의 후예였지만 몰락한 집안에서 곤고한 삶을 살았다. 나서 죽을 때까지 ‘글씨 외길’을 걸어온 것 말고 내세울 경력은 없다.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전업 예술가로 치열하게 살았던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1770∼1847). 19세기 호남서단에서 물 흐르듯 이어지는 유수체(流水體)를 완성해 필명을 떨친 그의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전시가 마련됐다.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2월 27일까지 열리는 ‘창암 이삼만―물처럼 바람처럼’전.

창암은 서울의 추사 김정희(1786∼1856), 평양의 눌인 조광진(1772∼1840)과 함께 조선 후기 3대 명필로 꼽히지만 연구가 부족해 지금까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이번 전시는 20대부터 70대까지의 작품과 미공개 작품 등 100여 점을 통해 그의 눈부신 궤적을 차근히 짚어 나간다.

중국 위진시대와 통일신라 김생의 서법을 섭렵한 뒤 물결치듯 유려하면서도 예스러운 필법을 농익은 경지로 펼쳐낸 창암. 연인을 넘어 예도(藝道)의 동반자였던 판소리 명창 심씨와 만나 교유하면서 판소리 가락의 운율이 스며든 유수체의 미학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 전시는 도학(道學)의 시각에서 글씨를 대했던 사대부 명필과 달리 서예를 예술로 생각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한 프로 예술가의 발자취를 되새기는 귀한 자리다. 3000∼5000원. 02-580-1300

■ 창암 이삼만展

글씨와 노래 사이

전시는 병풍과 현판, 글씨 쓰는 법을 가르치는 서첩 등을 통해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던 창암의 예술세계를 펼쳐 보인다. 그의 작품에선 행초서(行草書)를 으뜸으로 치는데 77세에 쓴 글씨를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 육언시 ‘四時詞(사시사)’에선 고전적 정형미가, ‘창암서적’에 나오는 글씨에선 파격적 매력이 두드러진다.

창암 서예는 글씨의 근본을 자연에서 구했기에 졸박미(拙朴美)가 느껴진다. 가늘고 굵은 선, 곡선과 직선, 먹의 농담 등 서로 반대되는 음양의 요소가 한 화면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먹흘림 자국이 남은 현판 ‘臨池觀月(임지관월)’, 때론 부드럽게 때론 거세게 물결치는 획이 춤추는 ‘山光水色(산광수색)’ 등은 유수체의 원숙한 경지를 드러낸다. 서예박물관의 이동국 학예사는 “동시대 추사가 구축적이고 건축적 서체를 구사했다면 창암에겐 글씨가 노래이자 춤이었다”며 “사랑하는 여인의 판소리 노랫가락이 글씨에 스며들게 해 붓이 노래하고 먹이 춤추는 듯한 글씨를 완성했다”고 설명했다.

평생 붓 하나로 살아온지라 숱한 작품을 남겼다. 그럼에도 처지는 작품 없이 수준이 고르다. 인상적인 것이 또 하나 있다. 창암은 매 작품에 관향, 이름, 자, 호를 빠짐없이 남기고, 종이 낱장마다 도장을 찍어 작가의 존재를 뚜렷하게 각인시켰다. 이는 ‘나는 이삼만이다’라는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강하게 드러낸 흔적이자 창암의 글씨가 곧 그의 자화상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무산 허회태展

글씨와 그림 사이

허회태 씨의 ‘이모그래피’전에서 선보인 ‘삶의 고뇌’. 서예와 회화를 융합한 작품이다. 사진 제공 허회태 씨
허회태 씨의 ‘이모그래피’전에서 선보인 ‘삶의 고뇌’. 서예와 회화를 융합한 작품이다. 사진 제공 허회태 씨
창암과 다른 맥락에서 전통 서예를 바탕으로 독창적 세계를 창시한 서예가의 전시가 열린다. 무산 허회태 씨의 ‘이모그래피(Emography)’전(11일∼2월 14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윤당갤러리 070-7735-2277).

그는 전통 서예의 서체를 두루 갈고닦은 뒤 서예와 현대회화가 서로 스며드는 이모그래피라는 새 장르를 만들었고 국내는 물론 독일과 미국에서 전시를 열어 주목받았다. 기운 생동하는 선으로 영혼의 깊이를 담고자 하는 작가는 한 번의 붓질로 천의 형상을 그려낸다. 용어는 낯설지만 미술계에서 “서법의 달관과 달필에서 얻은 총화를 배경에 두고 감성의 세계를 불러들여 시서화를 아우르는 통합체를 구축”(평론가 김복영)했다는 평을 듣는다.

어제와 오늘의 예술가를 조명한 두 전시. 남들 눈에 두렵게 보이는 벽을 가로질러서 서예의 영토를 확장한 시도란 점에서 의미가 깊다. 그들은 길이 있어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는 곳이 길임을 일러준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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