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전영록의 OST]CCR의‘프라우드 매리(Proud Mary)’

  • Array
  • 입력 2010년 5월 20일 16시 33분


코멘트

● 1970년대 명동 음악클럽 최고의 인기밴드 CCR(Creedence Clearwater Revival)
● 번안 전문가수 조영남 선배를 위한 변명
● 명가수 티나터너의 자전영화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에 등장

1960~70년대 최고 인기 밴드 ‘CCR’.
1960~70년대 최고 인기 밴드 ‘CCR’.

팝의 황금기였던 1960~70년대로 눈을 돌려보자

먼저 당시 우리 대중가요 시장의 구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듣기 편한 '포크 발라드' 아니면 전통적인 '트롯'과 미8군 소속 가수들의 팝 성향의 곡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리고 일부이긴 했지만 젊은층에선 미8군 주변에서 결성된 밴드들의 록 음악도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같은 모든 대중음악이 집합적으로 소비되던 장소가 음악다방이었다. 국내 다운타운계의 최고봉이던 '명동'의 많은 음악다방에는 미국 팝과 록 음악들이 자리를 차지했고, 이어 내로라하는 국내 뮤지션들이 곳곳에서 모여들어 음악에 심취했다.

이런 문화가 전국으로 전파되자 지방의 뮤지션들까지 이곳 '명동'으로 모여들게 된다. 뮤지션들과 젊은이들이 마주하는 장소로 부상하자,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서울시내 최고의 명소로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이다(따지고 보면 당시 명동이나 지금의 홍대 문화가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이는 다운타운 음악다방들 중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팝그룹이 있었는데 바로 캘리포니아 출신의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Creedence Clearwater Revival)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씨씨알(CCR)이다.


밴드 ‘CCR’ 멤버들.
밴드 ‘CCR’ 멤버들.

■ 60~70년대를 관통했던 최고의 록밴드, 밴드의 전설 CCR

이들은 앨범을 중시하는 밴드와는 달리 일련의 1950년대 풍의 복고적인 록큰롤 싱글을 발표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1969년 1월에 발표돼 전 세계 젊은이들을 열광케 했던 곡이 바로 '프라우드 매리'라는 노래다. 이 노래를 소개하기 앞서 번안곡의 유행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해야겠다.

당시엔 국내 가요의 절반 이상이 외국번안가요였다. 가수들도 데뷔곡을 제외하고 가장 자주 부르는 노래가 번안가요였고, 새 앨범에도 익숙한 느낌의 번안곡들을 많이 수록했다. 그런데 이 같은 번안가요를 데뷔곡으로 들고 나온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조영남이다.

그의 데뷔곡은 영국가수 톰 존스가 1968년에 불렀던 '딜라일라' (Delilah)였고, 그의 대표곡 또한 경쾌한 리듬의 '물레방아 인생'이란 곡인데, 이 곡이 바로 CCR의 '프라우드 매리'을 번안한 것이었다.

조영남은 그 후로도 국내 히트가요를 리메이크하거나 외국번안가요를 불러 왔는데, 이런 그의 행보는 많은 가요팬들의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조영남은 히트곡 없이 다른 사람들 곡만 부른다"라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한 것. 하지만 한 솥밥을 먹어온 음악계 동료로서 약간의 변론을 해주고 넘어가보자.

그에게도 히트곡이 분명히 있다. 요즘도 자주 부르는 '화개장터'! 외국 번안곡도 아니고, 남의 노래도 아닌 조영남의 노래다. 그리고 후배인 나도 좋아하는 김이환 작곡의 '사랑이란'이 있다.

진정 그대가 /
원하신다면 /
그대 위해 떠나겠어요 /
헤어지기가 섭섭하지만 /
묵묵히 나는 떠나겠어요


이 곡은 흥얼거리기에 너무너무 좋은 곡이다. 워낙 성량 좋은 가수이다 보니까, 본인의 곡이 아닌 리메이크 곡이나 번안 가요가 더 잘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조영남이란 가수가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힘 있는 노래들을 불러주었으면 좋겠다. 아프지 말고 말이다. 이상으로 조영남 선배의 변론을 마치고 다시 CCR로 돌아가 보자.
1978년도 당시 TV에 출연한 가수 조영남.
1978년도 당시 TV에 출연한 가수 조영남.


■ CCR의 음악이 사용된 영화들


1970년,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친구와 함께 통기타를 치며 CCR의 음악들을 연주하고 불렀었다. 'Proud Mary', 'Who'll Stop The Rain', 'Have You ever seen the rain' 등등. 정말, 그때가 좋았었다. 왜 그때가 좋았다고들 하는 건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때가 묻지 않았던 순수의 시대였고, 아무 것도 모르던 철몰랐던 때였기 때문이리라.

이렇듯 전 세계인들이 열광하였던 CCR의 음악은 60, 70년대 청년기를 보냈던 많은 영화인들에게도 그 영향을 주어, 그들이 만드는 작품들 속에는 CCR의 명곡들이 영상과 멋들어지게 어우러졌다.

CCR의 음악들이 지구촌을 강타할 무렵인 70년대 초반, 미국 남쪽 흑인 빈민가의 바(Bar)나 클럽 등지를 순회하며, 탄탄한 인기를 굳혀온 흑인 혼성 듀오이자 부부인 아이크 터너와 티나 터너가 CCR의 '프라우드 매리'를 리메이크 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티나 터너란 전설적인 흑인 여성 소울과 록의 디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리듬 앤 블루스와 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음악들을 구사하며 그야말로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워지고 있는 티나 터너. 남편인 아이크 터너와 함께 '프라우드 매리'를 열창했던 그녀 티나 터너.

그녀의 자서전 '나는, 티나'가 1993년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What's Love Got To Do With It)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됐다. 이 작품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던 천재적인 여성 뮤지션의 인생 역정을 담아낸 최고의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게 되었다.

팝계의 디바, 전설적인 록의 여왕이기 이전에 인간 티나가 겪어왔던 40여 년간의 연예생활 이면을 감독 브라이언 깁슨이 잘 묘사했다.

티나 터너의 본명은 안나 메벌룩(Anna Mae Bullock)이다. 10대 시절 우연히 아이크 터너의 공연장에서 스카우트 되어, 그 실력을 인정받아 곧장 아이크의 공연에 합류한다. 티나가 점점 그 인기를 더해가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을 즈음, 아이크의 끈질긴 구애로 둘은 결혼을 하게 된다. 문제는 그 직후부터 남편인 아이크의 학대가 시작이 되는데….

심지어 무대에 오르기 1분전까지도 행해지는 아이크의 폭력이 그녀를 실의에 빠지게 만들었고, 그러한 학대 속에서도 그녀가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동양의 종교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마음의 평온을 갖게 되고, 남편인 아이크 터너와는 1977년 정식으로 이혼, 티나 터너란 이름으로 재기를 시도해 불혹의 나이로 극적인 성공을 하게 된다.

1993년작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What's Love Got To Do With It).
1993년작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What's Love Got To Do With It).

■ 전설적인 여가수 티나터너의 '프라우드 매리'

국내 개봉 시 제목은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고 원제는 'What's Love Got To Do With It'인 이 영화에서 티나 터너로 분한 안젤라 바셋에게 티나 본인이 직접 동작과 언어, 표정, 무대매너, 목소리 등을 훈련시켜 주었다. 이에 힘입어 당시 가수이자 연기자였던 안젤라는 천재성을 십분 발휘해 1994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었고, 골든글러브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작품 속의 '프라우드 매리'를 아이크 터너로 분한 로렌스 피쉬번이 티나 터너와 함께 직접 불러주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였다.

아이크와 티나의 '프라우드 매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들은 가끔, 우리에게 편한 것을 듣고 싶어하죠 /
하지만, 우린 절대로 편하게 노래하지 않아요 /
우린, 항상 거칠고, 편한 노래를 부른답니다 /
그러나 이번 노래는, 시작은 편하게,
그리고 끝에는 거칠게 부르겠어요 /
원래 '프라우드 매리'를 부른 CCR처럼 말이죠."



지금 내 옆에는 통기타가 덩그마니 누워있다.
살포시 움켜 세워서 나도 불러볼까?
그들의 노래처럼?
부드럽게 시작해서 거칠게 마무리 지어볼까나?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
2010년 5월 17일
우리 '엄니' 돌아가신지 일주일째 되는 날, 새벽녘에 전영록? 아니 전영락 쓰다.
칼럼 더보기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