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10년전 헤어진 자리로 돌아온 남녀, 하염없이 내리는 눈속 한점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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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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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설주의보 / 윤대녕 지음 / 304쪽·문학동네·1만2000원

‘편의적으로’ 말하자면 이 소설집에는 남녀의 인연에 관한 소설이 주로 실려 있다. 그런데 두 남녀가 빚어내는 감정들은 지나치게 뜨거워서 아프지도, 환멸이나 증오로 고통스럽지도 않다. 낯선 두 사람이 서로의 삶에 막 개입하기 시작할 때 생기는 의존, 적대의 양가감정은 이미 한 차례 휘발된 뒤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처의 선혈도 멎었고 일상에 섞여들면서 조악하던 욕망도 풍화됐다. 그리고 그 뒤에 남은, 더욱 투명해진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

중견작가 윤대녕 씨(48)는 개인의 내면세계에 대한 천착으로 돌아선 1990년대 한국문학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동안 ‘1990년대적인 낭만성’을 섬세하면서도 감각적인 문체로 구현했던 ‘은어낚시 통신’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등 10권이 넘는 장편과 단편집들을 펴냈다. 이번 소설집은 2007년 ‘제비를 기르다’에 이어 출간한 여섯 번째 신작 소설집이다.

그의 작품들 속에는 연인인 남녀 주인공들의 운명적인 만남과 엇갈림, 길, 외출, 산사(山寺), 여행 등이 빈번히 등장한다. 이번 소설집에서도 이런 특징들이 자주 엿보인다. 하지만 격정적이고 신비스럽다기보다는 좀 더 현실적이고 차분한 이야기들이다.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지지만 그래서 한층 정갈하다.

표제작인 ‘대설주의보’는 마지막 장면이 주는 선명한 이미지로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고 난 느낌을 주는 단편이다. 한때 연인이었으나 오해 때문에 갈라서게 된 두 남녀가 10여 년의 세월이 더 흐른 뒤 우연히 다시 만난다. 남자는 잡지사의 청탁으로 가끔 취재를 다니거나 소설을 집필하는 불안정한 중년의 전업작가다. 여자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며 속초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다. 예정이라도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재회한 두 사람은 오랜 기간을 두고 서로에게 조금씩 다가간다. 두 사람을 갈라놓았던 오해가 풀리고, 지난 시간의 앙금이 사라지고, 서로에게 솔직할 수 있을 때까지 아주 더디게. 작가는 이 미묘한 다가섬의 과정을 절제된 언어로 차분히 묘사한다.

마침내 두 사람이 비로소 10여 년 전에 있어야 했던 그 자리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그날, 엄청난 폭설이 내린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길을 뚫고 서로에게 가던 두 사람이 산길 한복판에서 마주치게 되는 마지막 장면은 무척 아름답다.

유방암을 얻게 된 주인공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담담히 그려낸 ‘보리’,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엇갈린 관계를 그려낸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 등이 함께 수록됐다.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신형철 씨는 “(전작들에 비해) 비극적 위엄은 소멸됐고 일상성은 강화됐다”며 “전작 ‘제비를 기르다’보다 한층 더 낮게 가라앉아 있는 이야기들 속에서 이제는 ‘범속한 비극’의 세계에서 ‘범속한 구원’의 순간들을 발견해내느라 윤대녕의 소설들은 쓰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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