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편지/이용규]‘후불제’ 많은 유럽… 신용은 생명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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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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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생활하면서 느낀 우리와 유럽의 가장 큰 차이점은 후불제 관행이다. 우리나라에서 물건 구입비용은 물건의 거래가 종료되는 순간 또는 미리 지불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자동차를 고치면 정비소에서 차량을 찾을 때 돈을 낸다. 혹은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려면 먼저 돈을 내야 한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후불제인 경우가 더 흔하다. 물건을 사고 나중에 돈을 지급하는 방식인데 기본적으로 사람 사이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한번은 정비소에 가서 자동차를 수리한 적이 있었다. 간단해서 비용이 40유로밖에 나오지 않았다. 현금으로 내려고 하는데 주인은 집으로 계산서를 보낼 테니까 그때 은행 계좌로 이체하라고 한다. 불편하기도 하거니와 처음 본 사람인데 내가 돈을 내지 않으면 어찌할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병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돈을 내지 않고 먼저 치료나 진찰을 받는다. 치료를 받고 나면 한 달 정도 지난 다음에 진료비 청구서가 우편으로 배달된다. 진찰을 받은 사람이 돈이 없다거나 이사를 가서 찾을 수 없다면 돈을 받기 어려울 텐데도 이런 방식을 운영한다. 집에서 보일러나 냉장고를 수리할 때도 기술자에게 바로 수리비를 주지 않는다. 나중에 청구서를 받으면 은행 계좌로 보내면 된다.

후불제는 여러 문제점을 낳을 수 있다. 고의로 돈을 내지 않는 사람도 있다. 구매자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을 경우엔 종전 집으로 청구서를 보내도 소용이 없게 된다. 그만큼 판매자에게는 위험이 많은 제도이다. 게다가 구매자는 금액을 바로 알 수 없기 때문에 가격을 깎을 수 없다.

신뢰를 중요시하지만 약속을 어기는 경우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식당이나 극장을 예약하거나 다른 사람과 하는 약속 역시 신뢰를 중요시한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점심 약속과 같은 사적인 약속을 어기는 사람은 아주 신용 없는 사람으로 여긴다. 사업상의 약속이나 면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더더욱 큰 문제로 생각한다. 개인의 신용뿐만 아니라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예약을 하고 이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에도 상당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한번은 무좀으로 피부과 병원에 예약을 했다. 그날 깜박 잊고서 병원에 가지 못했다. 3주일 후 병원에서 요금청구서가 날아 왔다. 화가 나서 병원에 전화를 해 보니 예약 취소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본비용을 청구했다고 한다. 병원에서는 이미 시간을 할애하여 놓았으며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을 진료하지 못했으므로 비용을 내라는 논리이다. 그날 불가피한 상황이 있었다는 사실(예를 들어 교통사고나 해외출장 등)을 증명하는 서류를 보내면 돈을 내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호텔에 예약을 하고 취소하지 않으면 호텔 이용과 상관없이 비용을 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식당에서는 예약을 받을 때 신용카드 번호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는데 통보 없이 식당에 오지 않을 때 요금을 청구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후불제는 아니지만 물건을 가져가고서 무인 요금함에 스스로 돈을 내는 판매 방법도 있다. 길가의 무인 신문가판대가 그것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신문을 꺼내고 동전함에 스스로 돈을 넣는다. 신문은 봉지에서 쉽게 꺼낼 수 있어 신문을 가져가고 돈을 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의 양심을 믿으므로 무인 신문가판대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런 관행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돈을 내지 않거나 원래의 가격보다 적은 돈을 내고서 신문을 가져오고자 하는 유혹을 종종 느낀다.

이용규 한국은행 프랑크푸르트 사무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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