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스터디/영화, 생각의 보물창고]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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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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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을 치유하는 약, 그 이름은 ‘함께’

《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으로 70대 노인이 등장하다니요. 주인공으론 보통 가면을 쓴 슈퍼히어로나 말하는 재주를 가진 귀여운 동물이나 예쁘고 순진한 공주 같은 비현실적 캐릭터들이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요?

디즈니-픽사가 만든 컴퓨터그래픽(CG) 애니메이션 ‘업(Up)’은 역발상(逆發想)의 진수입니다.

주인공으로 백발노인이 등장한다는 사실도 놀랍거니와, 이 노인이 특별한 능력과 사연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은 더욱 놀라운 대목이지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영화제인 칸 국제영화제가 올해 개막작으로 ‘업’을 선택한 것도 이 영화가 보여주는 창의성과 도전정신을 높이 샀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그런데 참 이상해요.

영화 속 노인은 수만 개의 풍선을 매단 자기 집을 기구(氣球)처럼 타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건만, 노인의 여정을 따라가는 우리의 마음은 들뜨기보단 도리어 쓸쓸하고 외로워지니 말이에요.》

[1] 스토리라인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게 꿈인 소년 ‘칼’은 어느 날 자신과 똑같은 꿈을 지닌 말괄량이 소녀 ‘엘리’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이윽고 결혼한 두 사람은 전설의 장소인 남미 파라다이스 폭포로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합니다. 하지만 현실이 그리 쉬운가요. 하루하루를 먹고 살아야 하는 팍팍한 현실에 부대끼다보니 두 사람은 약속을 이룰 엄두를 내지 못하지요. 이 와중에 엘리마저 의사로부터 불임(不姙)을 통보받지만, 부부는 서로를 향한 사랑을 굳게 지키며 함께 늙어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가 세상을 떠납니다. 평생의 동반자였던 아내를 잃은 칼은 아내와의 추억이 서린 집을 지키며 세상과 단절된 채 고집불통 늙은이로 살아갑니다. 칼의 집터는 재개발 부지로 묶이게 되고, 결국 집은 하루아침에 철거될 위기에 처하지요.

이때 꿈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칼이 수만 개의 풍선을 집에 매달아 하늘 위로 두둥실 띄운 것이지요!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남미로의 모험을 시작한 겁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요. 탐험가를 꿈꾸는 8세 소년 ‘러셀’이 칼 할아버지의 집을 방문했다가 얼떨결에 이 여정을 함께하게 된 거에요. 우여곡절 끝에 칼과 러셀은 남미에 도착하게 되고, 파라다이스 폭포를 향한 노인과 꼬마의 모험담은 시작됩니다.

[2] 생각 키우기

이 영화 속엔 중요한 상징(Symbol)이 있어요. 바로, 칼의 집이지요. 보통 사람들 같으면 자기 집터가 재개발되어 큰 보상을 받게 되면 환호작약(歡呼雀躍)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영화 속 칼은 기뻐하기는커녕 집에 풍선을 매달고 도망칠 만큼 자기 집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지요.

왜일까요? 그건 집이 칼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평생을 아내와 살아온 낡은 집은 ‘아내와의 추억이 서린 공간’이란 의미를 지나, ‘아내 그 자체’인 것이죠. 풍선에 매달린 집을 힘겹게 끌면서 파라다이스 폭포를 향해 고통스런 발걸음을 내딛는 칼의 모습을 보세요. 그건 사별(死別)한 아내를 짊어지고 약속의 장소를 향해가는, 회한 가득한 고행(苦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남미를 향하는 칼의 여정은 신나는 모험이 아니라, 아내와의 약속을 완수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영화가 위대한 이유는 따로 있어요. 생명보다 소중한 이 집을 종국엔 칼이 ‘극복’하기 시작한다는 점이지요.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요?

자,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어떤 장면일까요? 바로 칼이 위기에 빠진 러셀을 구하기 위해 풍선이 매달린 집을 다시 힘껏 하늘 위로 띄우는 순간이에요.

이 장면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요? 생각해 보세요. 이 순간 칼은 집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기 위해 집안에 있던 각종 가구와 집기들을 모조리 끄집어내 버리잖아요? 근데 그 가구와 집기들은 아내와의 사랑과 추억이 모두 깃들어 있는 생명보다 소중한 물건이었죠. 그래요. 바로 이 순간 칼은 자신의 마음을 평생 옭아매었던 아내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해요. 아내와의 추억에 빠져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온 ‘과거의 나’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한다는 얘기죠.

여기서 러셀이라는 꼬마의 존재가 중요해요. 러셀은 그저 칼의 모험에 동참하는 조력자 정도가 아니에요. 뭐랄까요? 러셀은 ‘또 다른 칼’이라고 볼 수 있어요. 아내에 대한 그리움 속에 평생을 살아온 칼과 마찬가지로 러셀도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며 살아온 존재이니까요. 러셀이 칼을 돕는 이유가 뭔가요? ‘노인 도와드리기’ 배지를 얻기 위해서잖아요? 그럼 러셀이 이 배지를 그토록 원하는 이유는 또 뭔가요? 엄마와 이혼한 뒤 따로 살고 있는 아빠가 이 배지 수여식에 와서 직접 배지를 달아 주리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지요.

맞아요. 칼과 러셀은 각각 아내와 아빠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살아온 외로운 존재란 점에서 서로 겹쳐지지요. 그러니까 칼이 집안에 있던 집기를 내던지고 러셀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순간은, 바로 칼이 과거(아내)로부터 벗어나 미래(러셀)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여는 극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영화 마지막 장면에 칼이 아내와의 약속을 상징하는 병뚜껑 배지를 직접 러셀의 가슴에 달아주는 모습을 보세요. 칼과 러셀이 그리움을 극복하고 꿈을 공유하는 일종의 ‘대안가족’을 이뤘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요?

이승재 기자 kr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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