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인간의 영혼을 파먹어가는 ‘부자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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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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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없는 삶
소비에 중독돼 불안-소외감 시달려
‘소유’ 아닌 ‘존재’ 택하는 지혜 제시

남자 주인공이 유산 1억 달러를 받기 위해 신붓감을 찾아다니며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 영화 ‘청혼’. 저자는 어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더 많은 재산이나 더 높은 지위를 통해 사랑이나 신뢰, 자아존중감을 충족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남자 주인공이 유산 1억 달러를 받기 위해 신붓감을 찾아다니며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 영화 ‘청혼’. 저자는 어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더 많은 재산이나 더 높은 지위를 통해 사랑이나 신뢰, 자아존중감을 충족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 어플루엔자/올리버 제임스 지음·윤정숙 옮김/567쪽·2만5000원·알마

전체의 3분의 2가 우울증이나 부정적인 생각에 시달린다. 대부분은 극단적인 불안을 느끼며 밤에 잠들기까지 평균 38분이 걸릴 정도로 불면증을 달고 산다. 하루에 담배 두 갑을 피우는 것은 물론 코카인 같은 마약을 하루에 평균 2회 복용한다.

뉴욕의 주식 중개인을 조사한 결과다. 높은 연봉과 지위, 안정적인 직장을 누리며 부유하게 사는 이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심각한 정서적 고통을 겪고 있다.

임상소아심리학자인 저자는 부유하면서도 부정적 심리상태에 시달리는 이들을 ‘어플루엔자 바이러스(affluenza virus)’에 감염됐다고 진단한다. 어플루엔자는 풍요를 뜻하는 단어 ‘affluence’와 유행성 감기를 말하는 ‘influenza’를 결합한 조어로 ‘부자병’, 즉 풍요로울수록 더 많은 것을 욕망하며 소비에 중독된 상태를 뜻한다.

저자는 책에서 미국, 영국, 호주, 중국, 싱가포르, 덴마크 등 20여 개국 240명의 인터뷰를 통해 어플루엔자의 증세와 원인, 치료법을 제시한다.

어플루엔자에 감염된 사람들의 대표적 증세는 불안감과 소외감, 무능감이다. 이 같은 정서적 고통의 원인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상품으로 다루기 때문. 이들은 자신의 가치를 재산이 얼마나 많은가, 높은 학력을 지녔는가, 외모가 매력적인가로 따진다. 즉 자신이 얼마나 유용한가로 판단한다.

이들은 이익을 얻지 못하면 공동체에 기여하거나 가족과 친구를 위해 희생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남들보다 더 나은가를 비교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타인보다 무능력하다는 자기비하를 겪는다. 이들은 더 큰 집, 더 높은 지위, 더 매력적인 외모를 소유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호주 사업가 윌은 “부유할수록 정체성이 더 강화된다”고 생각한다. 부유하지만 전형적인 양극성장애(조울증)와 과잉행동장애 증상을 보인다. 요트나 스포츠카를 소유하는 데서 만족을 찾고, 인간관계는 모두 일의 연장선상에서만 이뤄진다. 저자는 이 같은 사람들을 ‘시장형 성격’을 지녔다고 표현한다.

특히 광고는 어플루엔자를 퍼뜨리는 대표적 매개체다. 뭔가를 더 사도록 만들기 위해 광고가 소비자들의 결핍감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광고를 보며 소비를 통해 자아정체감을 충족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사랑이나 자존감처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사려 하는 이들은 어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염될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돈과 명예, 성공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 같은 ‘바이러스 목표’를 추구하면서도 정서적으로 건강한 이들이 있다. 중요한 것은 목표가 아니라 동기다. 예를 들어 살 집이나 먹을 음식이 없어서, 혹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은 건강한 동기다.

싱가포르의 미란다는 25세의 백만장자 여성 기업가다. 그는 응용경제학에 흥미를 느껴 관련 분야를 공부했다. 채권과 주식투자에 재미를 느꼈고 부(富)는 그 과정에서 따라왔을 뿐이다. 이 경우 자아정체감은 일로 번 돈이 아니라 일 그 자체를 통해 충족된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때 사람은 그 일에 몰입하고, 칭찬이나 보상이 아니라 행위 자체를 위해 움직인다. 이런 인물은 어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면역력이 높다.

교육은 면역력을 높이거나 낮추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성적이 좋을 때만 부모의 칭찬을 받고 자란 아이는 사랑을 받기 위해 더 좋은 성적을 거둬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아이는 자신이 얻어낸 성적을 통해서만 행복해질 수 있다. 어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취약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저자는 에리히 프롬이 던졌던 질문, ‘소유냐, 존재냐’를 다시 한 번 던진다. 삶과 욕구를 직시하는 진정성,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생동감,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 행동하는 놀이를 소유 대신 존재를 택하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한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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