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대신 사과해줍니다… 도처에 널린 당신의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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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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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과는 잘해요/이기호 지음/244쪽·1만 원·현대문학

‘익살꾼’ 이기호 첫 장편소설
독특한 소재로 인생 성찰
“수수께끼 풀듯 기묘한 느낌”

첫 장편소설 ‘사과는 잘해요’를 펴낸 작가 이기호 씨. 이 작품에서 그는 죄와 고백, 사과와 용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부조리한 사회를 그렸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첫 장편소설 ‘사과는 잘해요’를 펴낸 작가 이기호 씨. 이 작품에서 그는 죄와 고백, 사과와 용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부조리한 사회를 그렸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이기호 작가는 단편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에서 기존의 문법이나 언어적 권위에 얽매이지 않는 유머를 선보였다. 랩의 운율이나 성경 구절을 패러디하며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기발한 입담에 독자들은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사과는 잘해요’는 첫 장편소설. 이전의 작품집과는 결이 다르다. 눈치 보지 않고 쭉쭉 뻗어나가는 간결한 문장, 무겁고 진지한 상황에 맞지 않는 엉뚱한 대화는 여전하지만 소설이 빚어내는 상황은 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다.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박혜경 씨는 “마치 안갯 속을 헤쳐 나가는 듯한, 혹은 난해한 수수께끼를 풀어 나가는 듯한 기묘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라고 말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감금과 폭력, 노동력 갈취로 운영되는 복지원에 갇힌 나와 시봉이다. 복지원에서는 이들을 길들이기 위해 매일 약을 먹인다. 이들은 약을 먹지 않으면 어지럼증을 느끼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약을 받아들인다. 자각과 비판의식이 결여된 두 사람의 유아적인 행동들은 종종 아이러니한 웃음을 유발한다.

그들은 방에 갇힌 채 양말을 포장하거나 비누에 상표를 붙이는 일을 하며 ‘시설의 기둥들’이 된 듯한 뿌듯함을 느낀다. 이처럼 안락한 환경을 제공해준 시설에 고마움을 느끼기도 한다. 이들은 원장의 조카인 복지사 두 명에게 상습적으로 구타당한다. 뭔가를 잘못했다는 것이 이유인데 나와 시봉은 하지도 않은 잘못을 지어내 말한 뒤 그들에게 맞아야 한다.

이런 상황들이 시설에 강제로 끌려온 한 노숙인의 고발로 세상에 알려지자 원장, 복지사들이 경찰에 잡혀가고 이들은 세상으로 내보내진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이들은 시봉의 여동생인 시연의 집에 얹혀살면서 뭔가 돈벌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복지원에서 했던 것처럼 주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뭐 사과할 것 없나요?”라고 묻는다.

그것은 의뢰인이 저지른 잘못의 대가를 시봉과 내가 대신해서 치르겠다는 것(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주겠다는 것)이다. 악의는 없지만 맹목적으로 사과 대행을 실행에 옮기는 시봉과 나는 그 대가로 돈을 받는다. 죄는 도처에 널린 것이므로 일이 끊길 걱정은 없다. 받아낼 사과가 없다면 죄를 먼저 만들면 된다.

이들이 의뢰를 받아 사건(?)을 해결해주는 일련의 논리들은 복잡하다. 보통 죄를 지은 뒤 고백을 하고 그에 대한 사과, 용서가 순차적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복지원 내에서 이들이 없는 죄를 가짜로 고백하고 복지사들에게 구타당했던 것처럼 세상에서도 역시 죄, 고백, 사과가 뒤죽박죽 섞인 형태로 발생한다. 고백을 한 뒤 죄가 새롭게 생긴다거나 죄에 상응하는 사과가 존재하지 않는 변수도 끼어든다. 거기다 시봉과 내가 ‘사과의 대리인’이다 보니 상황은 한층 더 복잡해진다. ‘사과의 대리인의 대리인’도 생기게 되고 이들은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이런 가운데 복지원 내의 비리를 알고 있는 시봉과 나를 없애기 위해 복지사들이 다시 나타난다.

소설의 제목인 ‘사과는 잘해요’가 무슨 뜻인지 의아한 것처럼 이 책은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궁금증이 남는다. 박 씨의 해설처럼 “알레고리적 환상으로 읽기에는 사실적이라는 느낌이 앞서고, 그렇다고 사실적인 상황으로 받아들이기에는 현실적인 개연성이 희박”해 보인다. 그런 만큼 다양한 해석과 상상의 여지를 남기겠지만.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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