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의 종착역인가

  • 입력 2008년 10월 24일 19시 44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임명한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2006년까지 18년 동안 경제대통령 노릇을 했다. 그는 취임 직후의 ‘블랙 먼데이’ 증시 폭락과 2000년 3월 닷컴 버블 폭발을 잘 수습해 ‘마에스트로(巨匠·거장)’라는 찬사를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 금융위기를 부른 파생상품 규제에 대해 재임 시 앞장서 반대했던 그는 미 하원 청문회에서 “40년간 잘 들어맞았던 이론에서 허점을 발견해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그린스펀은 닷컴 버블을 집값 버블로 대체해 놓았다”며 “금융위기 사태에 책임이 가장 큰 사람”이라고 공박했다. 노벨경제학상을 탄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그린스펀은 금융 시스템의 무절제가 뚜렷해졌는데도, ‘자율 규제’만 외쳤다”고 비판했다. 스티글리츠는 “지난 30년 동안 시장경제는 전 세계에서 100번도 넘는 위기를 맞았다. 시장 그 자체는 충분하지 않다. 정부 규제와 감독은 시장경제를 작동시키는 필수 요소”라고 말했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경제이론도 특정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탄생한다. 시대 상황이 바뀌면 한때 참신했던 이론도 고색창연한 독단이 될 수 있다. 국제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1980년대 이후 세계경제를 주도했던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이 종착역에 다다랐다는 진단이 보수적인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최근 뉴스위크지는 레이건 대통령의 초상화가 여기저기 찢긴 풍자만화를 실었다.

罪人된 ‘마에스트로’ 그린스펀

레이건 대통령은 정부지출 감축, 세금 감면, 규제 완화를 경제성장의 엔진으로 삼았다. 비슷한 시기에 집권한 마거릿 대처 영국총리도 자유시장경제와 민영화, 직접세 감면, 노동조합 반대, 복지의 축소 정책을 밀고나갔다. 레이건과 대처는 노동조합의 불법 파업을 강경진압하고 기업이 근로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도록 했다.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몰락을 끌어낸 후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은 불멸의 진리 같은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그늘도 있었다. 대처 집권 기간 소득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 계수는 1979년 0.25에서 1990년 0.34로 악화됐다. 레이건의 감세 정책도 무역적자와 연방재정적자를 촉진해 국가부채를 심각하게 증대시킴으로써 현재 미국 경제위기의 근원을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인류 이데올로기 진화의 종점’이라고 평가했던 국제정치경제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최근 뉴스위크 기고문에서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이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고 선언했다. 세금 감면은 성장을 충분히 자극하거나 세수 증대를 가져오지 못했고, 시장과 보조를 맞추는 데 실패한 규제 완화는 지금 목격하는 것처럼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이다.

후쿠야마 교수는 규제가 가벼울수록 실리콘밸리에는 유익하지만 월스트리트에 대해서는 투명성과 당국의 감독을 강화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 부문의 붕괴는 전 국민에게 무차별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국내총생산(GDP)의 9배에 해당하는 은행 부채를 짊어지고 국가파산 지경에 이른 아이슬란드를 보더라도 탐욕스러운 금융시장을 자율에 맡겨둘 수만은 없다.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크루그먼은 뉴욕타임스에 일주일에 두 차례씩 칼럼을 쓰며 왕성한 언론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2005년경 칼럼을 통해 금융위기를 부른 집값 버블을 수차례 경고한 몇 안 되는 경제학자여서 더욱 권위가 높아졌다. 그는 ‘진보주의자의 양심’이라는 저서를 통해 미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극심한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장에 맡겨놓을 수만은 없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같은 강력한 개입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근 칼럼에서는 비금융 부문의 실물경기까지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감세(減稅)보다는 정부지출을 늘려서 최악의 경기 침체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고불변의 경제이론은 없다

그러나 에드워드 프레스콧(200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은 “높은 세율은 창발성, 위험감수 정신, 생산성을 짓누르는 확실한 방법”이라며 “게임의 룰을 너무 극적으로 바꾸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에릭 매스킨(2007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은 “많은 시장은 외부의 간섭이 적거나 없어야 최선을 다할 수 있다”며 다만 금융시장은 정부의 ‘돕는 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만고불변(萬古不變)의 경제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右)의 적폐가 심해지면 좌(左)로, 좌가 실패하면 우로 바뀌는 것이 민주주의의 강점이기도 하다. 시대적 환경과 국가가 처한 현실에 따라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방법론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황호택 수석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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