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6년 양정모의 쾌거

  • 입력 2008년 8월 1일 03시 04분


베이징 올림픽 개막이 7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최대 10개 정도의 금메달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미 금메달을 사실상 예약한 선수도 있다고 한다.

이번 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금메달을 하나도 따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는 국민은 단연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30여 년 전만 해도 올림픽 금메달은 전 국민의 염원이자 대한민국의 숙원이었다.

요즘처럼 대구의 기온이 35.8도까지 치솟는 등 전국이 폭염에 시달리던 1976년 8월 1일. 한 달째 비가 내리지 않는 가뭄까지 겹쳐 있었다.

열대야에 잠을 설치다 느지막이 잠에서 깬 국민에게 선물이 배달됐다.

대회 폐막을 불과 몇 시간 앞둔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양정모 선수가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의 금메달을 따냈다는 소식이 뉴스를 통해 숨 가쁘게 전해졌다.

양정모는 이날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 마지막 경기에서 당시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자인 몽골의 오이도프에게 8-10으로 졌다.

당시에는 예선을 거쳐 3명이 결승리그를 벌여 최고 점수를 얻은 선수가 우승하는 대진 방식이었다.

양정모는 결승리그 첫 경기에서 미국의 진 데이비스를 폴로 꺾은 반면 오이도프는 데이비스에게 판정패했다.

6점 차 이상이나 폴로 지지 않으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유리한 고지에서 마지막 경기에 나선 양정모는 “지더라도 정정당당하게 싸우겠다”며 적극적인 공격을 펼쳤다.

3라운드 한때 8-6까지 앞서 나가던 양정모는 막판 오이도프에게 역습을 허용하며 8-10으로 역전패했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린 후 주심은 오이도프의 손을 들었다. 그러나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한 쪽은 최고점수를 얻은 양정모였다.

일요일 신문이 발행되지 않은 당시 양정모의 금메달 소식은 호외로 만들어져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하루가 지난 월요일자 동아일보의 1면 머리기사는 ‘전 국민이 염원하던 금메달을 양정모 선수가 드디어 쟁취했다’고 전했다.

그랬다. 건국 후 처음으로 참가한 1948년 런던 올림픽 이후 은메달 5개, 동메달 7개만 땄던 당시 우리나라에 금메달은 쟁취의 대상이었다.

양정모 이후 우리나라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까지 동·하계 올림픽에서 금메달만 67개를 따냈다.

명실상부 스포츠 강국으로 위상을 굳혔다. 그런 만큼 이제는 금메달에만 집착하기보다는 경기와 그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 드라마를 즐길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현두 기자 ruch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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