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강한대학]<11>핀란드 헬싱키예술·디자인大

  • 입력 2006년 4월 27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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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IAH의 한 학생(왼쪽)이 판재를 휘어서 가공하는 방법을 강사에게 묻고 있다. 학생들은 자신의 작품을 학창 시절에 상업화할 정도로 경영 마인드가 강하다. 헬싱키=허진석  기자
UIAH의 한 학생(왼쪽)이 판재를 휘어서 가공하는 방법을 강사에게 묻고 있다. 학생들은 자신의 작품을 학창 시절에 상업화할 정도로 경영 마인드가 강하다. 헬싱키=허진석 기자
《“제 논문 필요 없나요? 정찬에 어울리는 나이프와 포크에 관한 연구인데 필요하면 하나 드릴게요.” 나이프를 만들다 말고 여러 가지 질문과 사진 촬영에 적극적으로 응해 준 아이노 벱셀레이넨(27) 씨는 자신의 논문을 외국기자에게 전하기 위해 애를 썼다. 핀란드 헬싱키예술·디자인대(UIAH) 학생들은 그렇게 마케팅에 적극적이었다. 이런 태도가 ‘디자이너는 마케팅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이 학교의 교육방침에서 나온 것임을 아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헬싱키 중심가인 스톡만백화점에서 6번 전차를 타고 20여 분 동북쪽으로 가면 도자기 공장이 있는 아라비아 지역이 나온다. 지역명을 커다랗게 달고 있는 9층 높이의 건물이 바로 UIAH다.》


이 학교에는 운동장은 물론이고 그럴듯한 나무 한 그루도 없다. 건물 하나가 전부다. 학생수는 약 1700명. 공장지대에 있고 규모도 작지만, 이 학교는 유럽 내 디자인분야 ‘빅5’ 대학 중 하나로 손꼽힌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이가 머리가 좋으면 법대나 의대를 보내려고 하지만 핀란드인은 머리 좋은 아이를 두고 “UIAH에 갈 아이”라고 얘기한다고.

4월 중순 찾은 학교는 5월 말 졸업전시회 준비로 분주했다. 통상 졸업전시회라고 하면 학내 행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학교의 졸업전시회는 그렇지 않다. 핀란드 언론들은 이 행사를 비중 있는 뉴스로 다룬다.

이 학교는 디자인연구(리서치)와 마케팅을 중시한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디자인대학들이 곧바로 창의적인 디자인과 패턴을 찾는 방식에 중점을 두는 것과 구별된다. 예컨대 휴대전화를 디자인할 경우 ‘커뮤니케이션’의 정의부터 다시 하고 ‘사람들이 편리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하려면 어떤 디자인이 필요한가’에서 출발해 창의적인 디자인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국제디자인경영(IDBM) 과정은 이 학교의 장점을 모아놓은 특화코스다. 이 과정의 학생들은 핀란드 기업이 후원하는 자금을 갖고 해당 회사 직원인 것처럼 과제를 수행한다. 노키아의 휴대전화를 디자인하거나 휴대전화 디자인 트렌드를 조사하는 식이다.

이와 별개로 학생들은 산학협력 과제로 1년에 통상 3, 4개의 작품을 만든다. 핀란드항공의 기내식 식기세트를 리모델링하는 프로젝트가 이런 방식으로 수행됐다.

학교 측은 유명 기업에서 실무 경험을 쌓은 사람들로 교수진을 구성해 학생의 이런 활동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이런 산학협력 바탕 위에 마케팅 마인드가 더해진다. 학생 자신이 디자이너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실력 못지않게 자신의 작품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벱셀레이넨 씨가 건네려던 논문도 검은색 장정이 아니라 예쁜 책으로 꾸며져 있었다. 졸업생들의 논문은 대부분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고, 그중 특별한 것은 서점에서 판매까지 된다는 것이 학교 측의 설명이었다. 책을 통해 작품을 알리는 ‘고급 마케팅’의 일환이다.

마케팅 마인드를 기르기 위해 학생 대부분이 인근 헬싱키경제대에서 경영학 수업을 듣는다.

학생들이 졸업전시회에 제출하는 작품을 위해 기업후원을 받는 것도 이런 교육의 일환이다. 졸업 작품이 아니더라도 좋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노키아와 같은 대기업을 찾아가 상업화를 제의한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는 제갈윤(28) 씨는 “자신이 디자인한 의자를 유명 가구회사인 아르텍에 판매한 학생을 알고 있다”며 “그 학생의 작품은 시내 매장에서 팔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런 독특한 교육방식 때문에 매년 280∼300명 뽑는 신입생 모집 때는 3000여 명이 몰린다.

UIAH는 20여 년 전부터 ‘국내 대학’에서 ‘세계 대학’으로의 변신을 시작했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준비는 각종 국제회의를 주최하면서 시작됐다.

도서관휴게실 볼 의자
학교 도서관의 휴게실에 있는 볼 의자. 이 학교 출신 디자이너인 에로 아르니오 씨가 1963년 만든 작품이지만 지금까지도 현대적 감각이 살아있다. 헬싱키=허진석 기자

위리에 소타마 총장은 “유럽 변방에 있는 핀란드로 유명 디자이너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많은 국제콘퍼런스를 기획했다”며 “그들이 오고가면서 학교가 국제화됐다”고 말했다. 학교는 지금도 디자인 분야에 새로운 화두가 떠오를 때마다 재빠르게 국제회의를 개최하고 해당 분야 자료집을 내는 방식으로 세계 디자인 분야 논의를 주도하고 있다.

단순히 국제회의만 여는 것이 아니다. 소타마 총장도 학교를 알리고 국제교류를 강화하기 위해 지금까지 100여 곳이 넘는 외국 학교를 찾아다녔다.

국제교류담당자인 산나 테코넨 씨는 “학생들은 유럽의 140여 개 디자인스쿨과 연계한 큐뮬러스(cumulus) 프로그램을 통해 어디서든 자신이 원하는 분야의 공부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헬싱키=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졸업생들 세계 산업디자인계 주름잡아

핀란드의 유리제품 전문회사인 이탈라(Iittala) 매장에는 상품 카탈로그가 예술작품 도록처럼 꾸며져 있다. 디자이너별로 작품 사진과 함께 디자인 연도, 디자인 의도, 제품 규격 등이 소개돼 있는 이 책자의 한 페이지는 완전히 작가의 프로필로 채워져 있다. 이들 작가 중에는 헬싱키예술·디자인대(UIAH)에서 공부했거나 교수를 지낸 인물이 많다.

카이 프란크, 하리 코스키넨, 스테판 린드포르스, 티모 사르파네바, 타피오 위르칼라 씨 등이 그들이다.

카이 프란크(1911∼1989)는 ‘핀란드 디자인의 양심’으로 불리는 인물로 불필요한 선을 쓰지 않는 디자인 철학으로 유명하다. 단순함과 실용성을 중시한 그는 UIAH에서 실용성을 바탕으로 한 디자인 철학에 대해 많은 강의를 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1958년 디자인된 카르시오(Kartio) 시리즈의 물병과 컵이 유명하다. 지금 봐도 여전히 현대적인 디자인이라는 느낌을 준다. ‘아테네의 아침’(1954년)이라는 유리 모빌은 핀란드 유리 디자인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세계 곳곳의 디자인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스테판 린드포르스(44) 씨는 산업디자이너로는 물론이고 조각가로도 명성이 높다. 헬싱키는 물론 뉴욕, 밀라노 등이 그의 활동무대다.

하리 코스키넨(36) 씨는 가구를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 패션분야에서 더욱 유명한 이세이 미야케와 파나소닉의 각종 제품을 디자인했다. 국내의 각종 전시회장에 종종 등장하는 공모양의 의자(Ball chair)도 이 학교 출신인 에로 아르니오(74) 씨에 의해 1963년 처음 만들어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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