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90>卷六. 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6월 22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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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자, 이만 위표의 일은 잊고 맡은 자리로 돌아갑시다. 항왕이 우리에게 속은 줄 알면 결코 그냥 있지 않을 것이오. 그 어느 때보다 무섭게 치고들 것이니 단단히 채비해야 하오!”

이에 한왕(韓王) 신(信)도 더 따지지 못하고 맡은 성벽 위로 가서 곧 있을 패왕 항우의 공격에 대비했다.

한편 동문 쪽으로 간 패왕은 저만치 누른 비단 덮개를 한 한왕(漢王)의 수레가 보이자 범의 울부짖음 같은 호령소리부터 먼저 내질렀다.

“한왕 유방은 어디 있는가? 항복하러 왔다면서 과인이 이르렀는데도 어찌 수레 위에 그대로 앉아 있는가?”

그러자 수레 문에 드리운 발이 걷히며 눈에 익은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군자는 죽일지언정 욕을 보이지 않는 법이라 했소. 아무리 사세(事勢) 부득이하여 항복하게 되었지만 과인도 명색이 한나라의 왕이오. 대왕과 나란히 왕으로 봉해진 과인더러 땅바닥에 무릎이라도 꿇으라는 거요?”

그렇게 이죽거리듯 말을 받는 사내는 얼른 보아서는 한왕 같았으나, 목소리부터가 벌써 아니었다. 좌독(左纛)까지 꽂은 황옥거(黃屋車)를 빌리고 왕의 복색을 걸쳐도 그가 한왕 유방이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린 패왕은 그때 벌써 두 눈이 뒤집혔다. 그런 일을 꾸민 한왕의 속셈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또 속았다는 느낌에 이가 갈렸다.

패왕이 급한 마음에 말을 몰아 한왕의 수레 앞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너는 한왕 유방이 아니다. 도대체 너는 누구냐?”

그러자 수레 안의 사내가 서슴없이 자신을 밝혔다

“밝게 보셨소. 나는 한나라 대장군 기신(紀信)이오.”

“과인은 그런 이름 없는 졸개(無名小卒)가 한나라 대장군이 되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바로 말하라. 너는 누구냐?”

“어버이께서 지어주신 자랑스러운 이름을 들려주었는데도 왜 내 이름이 없다 하시오? 또 이 몸이 한나라 대장군인 것도 어김없는 사실이오. 간밤 우리 대왕께서 내게 이 형양성을 맡기시면서 나를 대장군에 가임(假任)하셨소.”

이와 같은 기신의 말에 패왕은 문득 한왕이 있는 곳이 궁금해졌다. 기신이 끝에 한 말을 되뇌며 앞뒤 없이 물었다.

“너에게 이 형양성을 맡겼다? 그럼 한왕 유방은 어디 있느냐?”

“이미 성을 나가셨소. 아마도 지금쯤은 관중(關中)으로 들고 계실 것이오.”

기신이 짐짓 느긋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듣자 패왕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때마침 위사(衛士)들을 이끌고 거기까지 뒤따라온 계포에게 소리쳤다.

“또 그 교활하고 음흉한 장돌뱅이한테 속았다. 어서 저놈을 끌어내려라! 그리고 수레를 뒤따라오고 있는 것들도 모조리 끌어다가 땅에 묻어버려라!”

이에 위사들이 달려가 기신을 수레에서 끌어내고, 뒤이어 달려온 한 갈래 초나라 군사가 수레를 뒤따르는 한군을 덮쳐 마소 몰 듯 한곳으로 몰았다. 그런데 그때 다시 패왕을 분통 터지게 하는 일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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