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고르고 나서]얼굴도 없는…그러나 강한 영혼들

  • 입력 2004년 6월 4일 17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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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 개가를 거부하며 자살해 나라에서 정녀(貞女) 칭호를 받은 한 시골 아낙네가 있었습니다. 21세기 한 젊은 한문학자가 이 정설을 뒤집습니다. 그녀는 절개를 지킨 것이 아니라 온전히 제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핍박하는 가족과 사회제도에 맞서 목숨을 던진 것이라고…. ‘향랑, 산유화로 지다’(B1)입니다.

‘영혼을 훔친 사람들’(B5)은 한 미국인 중국사학자가 1768년 청나라에 집단광기처럼 번진 무고(誣告)사건의 전말을 파헤친 것입니다. ‘영혼을 훔친 자’로 억울하게 지목돼 몰매를 맞고 스러져간 청대의 승려 거지들이나 조선의 향랑이 제 목소리를 담은 기록을 남겼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후학들은 당대의 호적부, 관리들이 남긴 검시기록 등 건조한 기록들의 퍼즐 맞추기로 이 얼굴 없는 사람들의 역사를 복원합니다.

엄밀한 기록만이 사라진 역사를 재구성하지는 않습니다. 미술사학자가 쓴 ‘트로이’(B3)에서 드러나듯 ‘나의 입술로 내 아들을 죽인 원수의 손에 키스를 했다’는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에 관한 한 구절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후대의 사람들은 이 비극을 본 듯이 재생해 냅니다.

독서의 매력은 이처럼 다른 시대, 다른 공간, 다른 사람의 마음속으로 여행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책의 영토가 ‘사람’에 한정된다고요? ‘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B2)를 읽을 때처럼 파리의 마음속으로도 갈 수 있습니다. 파리에게 마음이 있다면 말이죠.

책의 향기팀 boo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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