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칼럼]오만과 편견

  • 동아일보
  • 입력 2003년 8월 29일 18시 00분


이만해도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자꾸 속았다는 느낌이 든다. 6자회담이 열리기 전부터 북한을 제외한 참가국은 2차 회담 약속만 잡혀도 성공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번 회담은 어쨌든 성공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가 누차 강조한 대로 한국이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주도적 역할’을 할 줄 알았다. 회담 전 한미일 조율을 마친 뒤 밝힌 대로 북한이 실망하지 않을 만큼 북한안보를 특별 고려한 제안이 나오리라고 기대했고, 우리측이 제시해서 워싱턴협의회에서 확정됐다는 단계별 북핵 해법이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 6자회담서 할 일 다 했나 ▼
회담 기간 중 유심히 살핀 국내외 언론엔 이런 내용이 한 줄도 비치지 않았다. 우리 대표단이 열심히 뛰지 않았다는 게 아니다. 각국이 ‘솔직하게’ 의견교환을 했다고 중국 신화통신이 보도한 걸 봐도 우리측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알 만하다. 북한 대표가 핵실험 의도를 밝혔을 때 “한국측은 어리벙벙한 것처럼 보였다”는 월스트리트저널의 보도를 보면 예상과 다른 분위기에 얼마나 놀랐을지도 짐작된다. 다만 왜 ‘결과적 오보’를 낳게 해서 우리 정부가 엄청난 역할을 할 듯한 희망을 갖게 했는지 의아할 뿐이다.
이제는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미국이 말로는 한국 입장에 동의한다고 해도 북한이 먼저 핵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정책엔 흔들림이 없다는 것을. 북한은 좀처럼 개과천선하지 않으며 중국 일본 러시아는 이 상황을 자국 이익 극대화의 기회로 이용한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아무리 자가발전을 한대도 우리 발언엔 힘이 실리지 않는 약소국 처지라는 것을.
정권을 유지하는 데 핵 말고는 기댈 게 없는 북한이 그래도 핵을 포기하게끔, 세계 최강국 미국이 어떤 여지를 주기 바라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심정일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미국은 9·11테러 이전의 미국이 아니다. 싫어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제국주의든 헤게모니든 일방주의든, 어떤 이름으로 불리더라도 미국은 자국 이익과 안전을 해치는 어떤 움직임도 용납지 않는 울트라 슈퍼파워가 돼 버렸다.
오만하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분하지만 그게 헤게모니의 본질이다. 고대 로마부터 대영제국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오만하지 않은 제국이란 없다. 오히려 영토와 속국 지배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미국을 ‘자비로운 제국’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자본주의 만발에 따라 땅과 파워에 대한 욕망이 돈 하나로 바뀌었다고 보면 간단하다.
그나마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제국은 반드시 제 무덤을 판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미세하게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그 오만 때문에 읽지 못하거나, 군산복합체의 이득에 휘둘리거나, 리더의 오판 또는 그릇된 소신으로 인해 자기파멸의 길을 걷게 마련이다. 미국이 이 제국의 아이러니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각자 명에 따라 지켜볼 일이다.
이 와중에도 다른 나라들은 애국심으로 무장한 채 제국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현실주의 노선으로 국익을 좇고 있다.
인구에 걸맞은 국제적 위상을 구하는 중국은 미국이 원하는 중재역을 함으로써 불공평한 무역 등에 대한 미국의 압력을 눅이려 했다. 미국의 군사 보호 아래 경제 번영을 이룩한 일본은 납북자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분주했다. 러시아도 이라크전 때처럼 국제무대 발언권을 잃을까봐, 또 미국이 30년에 걸친 무역제약을 풀어주기를 기대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약소국의 현실 직시해야 ▼
이들 ‘주변 강대국’과 달리 우리는 미국도 북핵도 두려워하지 않는 유일한 나라처럼 보인다. ‘우리는 하나’라는 낭만적 민족주의에 ‘하면 된다’는 유별난 자신감,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겁날 게 없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편견이 겹쳐 북한을 자극하는 어떤 움직임에도 맞설 기세다. 김정일 정권이 곧 북한은 아니며 북핵은 어느 나라도 묵인하지 않는다는 현실엔 무심하고도 관대하다.
우리 정부가 추구하는 것은 국익인가, 아니면 반미 감정에 편승해 정권을 잡았듯 낭만적 민족주의를 이용해 지지세력을 잃지 않겠다는 사익을 추구하는가. 약소국에 필요한 건 간교하리만큼 현명한 외교술이다. 2차 6자회담에서도 이번처럼 무기력한 처지를 감내하지 않으려면 더 늦기 전에 명확한 선을 그어야 한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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