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 저편 402…낙원으로(19)

  • 입력 2003년 8월 25일 18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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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말 발음이 이상해도 때리고. 병사가 술을 마셨거나 기분이 나쁘면, 아무 이유 없어도 때려. 아이고, 너무 맞아서 귀까지 안 들린다. 오른쪽 귓속에서 파리가 한 마리 붕붕 날아 다니는 것 같다, 아이고.”

“커다란 가죽띠로 허리 맞아서, 이것 봐라. 시퍼렇게 멍이 생겼다.”

여자는 말린 정어리를 입에 문 채 초록색 간편복을 걷어 올리고 멍을 보여주었지만, 나미코는 얼굴도 눈도 움직이지 않았다.

“안 먹으면 몸이 약해져서 죽는다. 에이코도 오토마루도 미야코도 죽었다. 이런 데서 죽으면 쓰겠느냐. 팔자가 더럽게 태어나서 그렇다고 체념하고 여기서 살 수밖에 없지. 이런 데서 죽으면 아버지하고 어머니가 슬퍼한다. 괴로워도 힘들어도 살아서, 살아남아서 조선에 돌아가야지. 된장국이라도 좀 마셔라.”

“잠도 잘 자야지. 평일에는 대충 열 명 정도지만,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열셋, 열넷을 상대하는 날도 있다. 바지 내린 채로 일 끝내고, 허리띠 묶으면서 밖으로 나가고, 거기 씻을 새도 없이 다음 남자가 들어온다. 개구리처럼 내내 다리 쩍 벌리고, 밤 되면 하도 아파서 오므려지지가 않는다.”

“그런 때는, 남자는 멋대로 하라고 내버려두고 꾸벅꾸벅 자는 거라. 잠을 안 자면 몸도 못 견디니까.”

“토벌하고 돌아온 병사들한테는 특별히 신경을 쓰라고 하는데, 지나 사람들 목숨 죄 끊어놓고 온 텁수룩한 수염에 시뻘건 눈, 그런 병사들하고 하는 데 어떻게 견디겠나. 너, 얼굴에 먹칠하고 마루 밑에 숨어 있는 숫처녀를 끌어내서 엄마 보는 앞에서 하고, 엄마, 할머니까지 삼대한테 더러운 짓 하고는, 쌓인 게 다 풀린 것 같다고 자랑하는 인간들이다. 숫처녀도 공짜인데, 왜 조선년들한테는 돈을 줘야 하느냐면서 삯도 안 준다. 빈대처럼 들러붙는다. 조금만 싫은 표정 지어도, 이 여보, 여보, 여보!”

“겨울이 제일 견디기 힘들다. 밖에서 들어온 고드름처럼 차가운 사내한테 안겨서, 겨우 몸이 좀 따뜻해졌나 싶으면 다시 차가운 몸이 들어오고…, 겨울에도 모포 두 장인 거는 마찬가지니까.”

“그래도 제일 무서운 거는, 같이 죽자고 하는 인간이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왜 몰라주느냐면서, 너 죽이고 나도 죽는다고 여기를 팍 찌르더라. 피가 사방으로 튀고, 허연 살이 불거져 나오더라, 아이고.”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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