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기자의 섹스&젠더]보이지 않는 것들에…

  • 입력 2002년 12월 5일 16시 11분


일상은 늘 똑같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실은 조금씩 새로운 표정을 갖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더욱 그렇다.

●체온에 대하여

체온(體溫)은‘신체 주요 내장의 온도로서, 우연한 변화를 하지 않는 곳의 온도’를 뜻한다.

그렇다면 우연한 변화를 하지 않는 신체의 주요 내장은 어디일까. 일반적으로 항문에서 6㎝ 이상 들어간 곳에서 측정한 직장(直腸)의 온도를 표준체온으로 삼는다. 그러나 임상적 편의를 위해 직장 온도 대신 겨드랑이의 온도를 잰다. 팔을 내려 상반신 옆면에 밀착할 때 겨드랑이가 만드는 빈 공간의 온도가 신체 내부의 온도와 근접하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발가벗은 몸으로 꼭 껴안을 때, 누구나 아름다운 사람(美人)이 된다.

남자와 여자가 껴안을 때의 자세는 두 팔을 서로 휘감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겨드랑이가 몸에 맞부딪친다. A라는 몸 안의 온도가 겨드랑이를 통해 B라는 몸 안으로 또는 그 반대의 방향으로 전달된다. 격렬하지도, 황홀하지도 않은 그 온기는 적당히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을 때처럼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40대 중반의 남자는 말했다.

“치열한 부부싸움 후에라도 아내를 껴안으면 애틋함과 행복감이 전해져요. 그런데 참 이상하죠. ‘원 나잇 스탠드’를 한 여자에게서는 체온이 주는 평화로움을 못 느꼈어요.”

몸으로 나눈 체온은 남자와 여자의 기억 속에 오래 머문다. 변덕스럽지 않은 체온은 사랑의 가장 정확한 바코드일 수 있다.

●소리에 대하여

배용준과 이영애가 함께 출연한 모 신용카드 TV CF는 프랑스 샹송 ‘남과 여(Un Homme et Une Femme)’를 배경음악으로 남자와 여자가 눈깜짝할 시간차를 두고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내가 언제나 당신 곁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여자)

‘내가 언제나 당신 곁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남자)

이 CF의 묘미는 짧은 시간차 속에 엇갈리는 남자와 여자의 내레이션 목소리이다.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갈망하는 남자와 여자는 영화 ‘사랑과 영혼(Ghost)’의 남녀 주인공 패트릭 스웨이지와 데미 무어처럼 생사(生死)의 세계를 넘나들지는 않는다 해도 아련한 여운을 남긴다.

남녀 관계에서 발생하는 여러 종류의 소리(목소리와 숨소리, 의도된 소리와 의도되지 않은 소리 등)에 대한 해석이야말로 상상력을 동반한 주관성과 자의성을 갖고 있다.

●이끌림에 대하여

“며칠 전 친한 동생을 만나 식사를 했어요. 그 동생은 내가 3개월 동안 열렬히 연애했던 여자예요. 그녀는 결혼을 해서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됐어요. 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내게는 7년 동안 사귄 또 다른 애인이 있어요. 활달하고 이해심 많은 그녀와 함께 음악을 듣고, 여행을 하면서 세월이 흘렀어요. 그녀를 만나는 내내 난 의젓하고 과묵한 남자였죠. 일을 하면서 수많은 여자들로부터 숱한 유혹을 받았지만 전혀 흔들리지 않았었어요. 내게는 7년 된 애인이 있으니까요.

이제는 친한 동생이 된 그녀를 아주 우연한 기회에 만난 것은 6개월 전이었어요. 그녀는 나보다 무려 14세나 어려요. 그녀를 처음 만난 뒤 그녀에게서 e메일이 왔는데, 어찌나 귀엽고 천진난만한 문체로 씌여 있던지….

그날부터 그녀의 매력에 퐁당 빠진 거예요. 그녀를 만나면 나도 한없이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게 됐어요. 내게도 이런 모습이 있었구나, 내 자신에 대해 놀랐답니다.

그녀는 어느날 내게 ‘결혼한다’고 했어요. 서로 ‘양다리’를 걸친 셈이었어요. 아쉽지만 ‘축하한다’고 했어요.

남녀간의 이끌림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어요. 나와 아주 다른 성향의 이성을 만났을 때의 신선함은 무섭도록 거대한 이끌림의 힘을 갖고 있어요. 이제는 유부녀이자 친한 동생이 된 그녀를 만나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려요.

그러나 눈빛만 봐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점쟁이처럼 알아맞히는 7년 된 애인은 나의 모든 감정변화를 알면서도 모른 체한 듯해요. 돌이켜 생각하면 그녀야말로 내가 결혼할 편안한 휴식처 같아요.”

솔직하고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 준 30대 후반의 남자를 앞에 두고 직접 이 말을 건네지는 못했다.

“헝가리의 대문호 산도르 마라이의 소설 ‘열정’을 읽으면요, 이런 구절이 나와요. 삶이 주는 최대의 선물은 ‘비슷한 성향’의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이라고요. 양극과 음극의 에너지 교환처럼 이원성 뒤에는 수많은 절망과 눈 먼 희망이 숨어있다고요.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아 참 잘 된 일이네요”라고.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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