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인권위원회 제8차 정기회의]피의자 실명보도 신중

  • 입력 2002년 11월 14일 22시 53분


독자인권위원들이 ‘피의자 및 의혹사건 관련자의 인권보호’를 주제로 좌담하고 있다. 왼쪽부터 양창순 위원, 이용훈 위원장, 김영석 위원, 이종왕 위원.안철민기자 acm08@donga.com
독자인권위원들이 ‘피의자 및 의혹사건 관련자의 인권보호’를 주제로 좌담하고 있다. 왼쪽부터 양창순 위원, 이용훈 위원장, 김영석 위원, 이종왕 위원.안철민기자 acm08@donga.com
주제 : 피의자 및 의혹사건 관련자의 인권보호

본보 보도로 피해를 본 독자의 구제신청을 접수해 정정 또는 반론보도 여부를 심의 의결하는 독자인권위원회(POC·Press Oversight Committee) 제8차 정기회의가 14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14층 회의실에서 열렸다. 회의에는 이용훈(李容勳·전 대법관) 위원장을 비롯해 이종왕(李鍾旺·변호사) 김영석(金永錫·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장) 양창순(楊昌順·신경정신과 전문의) 위원 등 사외인사 4명과 본사 독자서비스센터장이 참석했다. 독자인권위는 9월의 제7차 정기회의 이후 접수된 보도피해 구제신청이 없어 안건심의는 하지 않았다. 인권위원들은 이날 회의에서 ‘피의자 및 의혹사건 관련자의 인권보호’를 주제로 좌담을 했다.<사회 김종완 본사 독자서비스센터장>

-최근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불러일으킨 ‘검찰조사 중 살인혐의 피의자 구타 사망’ 사건에서 관련 피의자의 신상에 대해 신문마다 실명 또는 익명으로 다르게 보도하는 차이를 보였는데요.

▽김영석 위원〓독자의 알 권리 충족과 프라이버시 보호는 늘 충돌하는 가치입니다.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없습니다. 피의자의 신상을 익명으로 다루는 것이 원칙이지만 공공의 관심사나 이익을 위해 필요할 때는 유죄확정 전에도 실명으로 보도해야겠지요.

▽이종왕 위원〓이번 구타사망사건 보도에서 주임검사의 경우는 제1보부터 실명을 공개한 것은 옳았습니다. 검사는 국가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단독관청의 역할을 하는 대표적인 공인입니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킨 사건에서 주임검사의 신상은 당연히 공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용훈 위원장〓이 사건의 경우 주임검사의 실명을 공개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자신이 관장하고 있는 장소에서 발생한 사안인 만큼 공인으로서 국민에 대한 무한대의 책임과 검증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조사실에서 일어난 사건의 내용은 객관적으로 보도돼야 하겠지요.

▽양창순 위원〓구타당해 숨진 피의자를 동아일보는 실명보도했는데 가족의 권리와 입장 등을 감안해 좀 더 신중하게 처리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이용훈〓사건의 성격상 숨진 피의자는 ‘피의자’와 ‘피해자’의 성격이 중첩돼 있습니다. 검찰조사실에게 구타당해 사망했다는 점에서 피해자의 시각을 강조하다보니 실명을 밝힌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더라도 신중한 보도 자세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김영석〓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이 실제로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데 얼마나 도움을 주느냐에 대한 판단이 실명 또는 익명보도의 한가지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실명을 쓰는 것이 독자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 그다지 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신상을 밝히지 않아도 좋겠지요.

▽이용훈〓피의자의 인권보호와 관련된 기준으로는 △사안 자체가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인가 △보도의 목적이 공익을 위한 것인가 △보도의 내용이 사실에 부합하는 진실인가 등 세 가지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종왕〓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관점에서 피의자가 현실적으로 흉기를 들고 전국을 활보하고 있는 ‘진행형’의 상황이라면 실명은 물론 인물사진까지도 보도해야 하지요.

-강도를 쫓던 시민이 경찰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오인사격한 경찰관의 신상공개는 어떤 기준으로 하는 것이 적절한지….

▽이종왕〓그 경찰관의 이름이 독자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핵심이라면 당연히 실명을 밝혀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고한 시민이 경찰의 오인사격으로 죽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핵심이지 그 경찰관이 김 경사인지 이 순경인지는 그 지역 주민 외에는 관심이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양창순〓일단 실명이 보도되고 부정적으로 낙인이 찍혀버리고 나면 현실적으로 그 선입견에서 벗어나기가 어렵게 됩니다. 본인은 물론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미치는 정신적인 피해를 감안한다면 오인사격한 경찰관의 경우 익명으로 처리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용훈〓무고한 시민이 죽었으니 공공의 이익과 관련되는 사안이고, 비록 일선 경찰관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공인이니 실명으로 보도할 수는 있겠습니다. 하지만 국민이 진정으로 알고 싶어하는 핵심이 그 경찰관의 이름은 아닐 것이라는 점에서 실명을 보도하는 것에 큰 의미는 없다고 봅니다.

▽김영석〓비교가 될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로드니 킹 사건이 일어났을 때 현지 언론들은 철저히 익명으로 보도하는 원칙을 지켰습니다. 물론 확정판결이 난 뒤부터는 실명으로 보도했지만….

-현역군인의 경기 포천군 영북농협 총기강도 사건과 관련해서는 모든 신문들이 구속된 범인의 신상을 ‘육군 모부대 소속 전모 상사’ 등 익명으로 보도했는데요.

▽이종왕〓수사단계의 피의자 신분인 데다 군부대 부사관이라는 사실이 핵심이지 범인의 이름이 중요한 관심사는 아니니 익명처리가 적절했다고 봅니다. 물론 범인이 사단장이나 연대장 정도의 직급이 된다면 독자의 알 권리 차원에서 문제가 달라지겠지만요.

▽양창순〓전 상사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데 특별한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의혹사건에서 의혹을 풀 열쇠를 쥔 인물로 지목받는 인물이 피의자의 신분도 아닌 상태에서 언론에 의해 신상이 쉽게 공개되기도 합니다. 최근 ‘현대전자 주가조작’ 의혹사건의 단서를 쥐고 있다고 거론된 전 현대중공업 부사장의 경우 취재기자와 접촉이 안되면서 ‘잠적’이라고 보도됐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이종왕〓당사자가 실제로 잠적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보도진과 접촉하기가 싫어서 피했는지 하는 보도내용의 사실성 여부가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재벌기업 핵심임원의 거취는 사회적으로도 관심사라고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요.

▽김영석〓최근의 정국상황과 관련해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사안이었던 만큼 취재노력을 거친 결과 객관적으로 증명되는 사실이라면 당연히 보도해야 한다고 봅니다.

▽양창순〓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관심사라면 보도해야 마땅하겠지만 행여 후속보도를 위한 의도적인 부풀리기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면 피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현실적으로 기자를 만나는 자체가 싫어서 보도진과 접촉을 피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잠적’이라고 보도할 수는 없겠지요. 더구나 그 접촉시도 가운데서 가족들이 겪게 되는 정신적 스트레스도 심각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용훈〓마지막으로 한가지 강조해 덧붙이고 싶습니다. 현장의 취재기자가 보내오는 기사들을 다듬는 데스크진은 인권이나 개인의 명예와 관련된 기사의 경우 실명 또는 익명 처리에 관해 명확하고 일관된 기준을 갖고 기사를 다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도로 인해 누구라도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보도 전의 철저한 기사검증노력이 요구된다는 고언을 드립니다.

정리〓김종하기자 1101ha@donga.com

▼참석자 명단▼

이용훈 위원장(李容勳·전 대법관)

이종왕 위원(李鍾旺·변호사)

김영석 위원(金永錫·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장)

양창순 위원(楊昌順·신경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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