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여자로 살아남기

  • 동아일보
  • 입력 2002년 10월 14일 18시 28분


“기자 바꿔.”
지금보다 젊었을 때 독자들의 이런 전화를 받으면 “저도 기잔데요, 말씀하세요” 하고 씩씩거리곤 했다. 좀 더 철이 든 후엔 아무나 옆에 있는 남자를 바꿔 주었다. 사소한 데 목숨 걸어봤자 나만 손해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책상 위에 식구 사진을 놓는 일 같은 건 안 한다. 남자라면 가족적이고 자상한 사람으로 비치겠지만 여자는 그렇게 집 생각만 해서 제대로 일하겠느냐는 오해를 받는다는 걸 아는 까닭이다.
▼가혹한 이중 잣대▼
헌정사상 첫 여성 총리로 기록될 뻔했던 장상 전 총리지명자가 여성 후배들에게 ‘장상 5계명’을 당부했대서 화제다.
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청문회장에서 대답을 똑떨어지게 하면 국회의원들이 ‘대단하시네요’ 했는데 마치 남편이 아내에게 ‘당신, 제법 잘하네’ 하는 식으로 들려 편치 않았다”고 했다. 눈에 보이는 남녀 차별은 대충 없어졌다지만 같은 직장의 여성이라도 아내나 어머니, 또는 딸급으로 간주하는 남자들은 여전히 숨쉬고 있다. 장 전 총리지명자가 도덕성이나 능력 또는 성별보다는 그 답변 태도 때문에 국회 인준을 못 받았다는 얘기도 설득력 있게 떠돈다.
같은 사안을 놓고서도 남자와 여자는 다르게, 때로 더 엄격하게 평가되는 것이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미국에서 부와 칭송을 한 몸에 모았던 ‘살림의 여왕’ 기업가 마사 스튜어트는 내부자거래 혐의로 감옥에 갈 위기에 몰려 있다. 그가 잘한 건 없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더 심한 잘못을 저질렀던 엔론, 월드컴 등의 최고경영자(CEO)에 비해 스튜어트씨는 훨씬 많이 타블로이드 신문의 표지를 장식했다. 자신이 성취지향적 일벌레 성격인 A타입이라는 그는 “남자가 A타입이면 열심히 일 잘한다고 평가받는데 왜 여자는 성질 더럽다는 소리를 듣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한 적도 있다.
요컨대 ‘그들’은 싫은 거다. 집에서 밥이나 하고 있어야 할 여자가 붐비는 시간대에 차를 몰고 나와서 남자의 앞길을 막는 게 짜증스럽듯이, 일과 상사와 스트레스라는 ‘세 마리의 용’과 싸우고 있는 아버지의 운명을 한낱 아녀자가 희롱하는 것이 달갑지 않은 것이다. 정작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건 아담인데 오늘날까지 이브가 유혹했다고 더 욕먹는 것처럼, 여성에게 가혹한 건 동서고금을 막론한 현상이라고 생각하면 차라리 마음 편하다.
장상 5계명은 이 같은 세상에서 여자가 살아남는 지침이 될 수 있다. 특히 여성문제 이해에 한계가 있는 남성에게 의존하지 말라는 1조와 여성에게 요구되는 일관된 기준이란 없으니 당당한 자신이 되는 것이 더 낫다는 5조는 피맺힌 처세술 교훈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 5계명이 남녀 편가르기처럼 비쳐 부담스럽거나 찬성하기 어렵다면 ‘김명자 5계명’을 대안으로 생각해봄직하다. 역대 여성장관으로서만이 아니라 현정부 최장수 장관으로 기록되고 있는 김 환경부장관을 잘 뜯어보면 여성이 남성 중심의 조직사회에서 생존 및 성공하는 방법을 알 수 있다.
첫째, 실력은 기본이다. 그렇지만 실력이 가장 중요한 건 아니라는 게 더 중요하다. 나머지 계명을 못 지키면 있는 실력을 보여줄 기회마저 놓치기 때문이다.
둘째, 튀지 않아야 한다. 신입 여직원 정도라면 귀엽게들 봐 주겠지만 지위가 올라갈수록 공격적인 모습으로 보여서 좋을 게 없다. 설치지 않으면서 할 일을 하는 것이 정치력이고 리더십이다.
▼´김명자 5계명´도 있다▼
다만 셋째, 내부는 확실하게 장악해야 한다. 김 장관은 능력에 따른 인사로 조직을 사로잡았다. 아직 인사권을 휘두를 자리에 있지 않다면 ‘남자다운’ 인간관계로 주변에 좋은 인상을 심는 게 필요하다.
넷째로 외모도 무시 못한다. 사람들이 북녘 여자응원단에 열광하는 것처럼 예쁘면 여자로 사는 게 한결 수월해진다. 전략적 활용을 해 볼 만하다. 그러나 다섯째, 김 장관이 언젠가 지인에게 털어놓았듯 가슴속에 숯덩이 하나는 지닐 각오를 해야 한다. 남자에겐 당연한 걸로 여겨지는 개인적 행복을 포기하거나 가족을 희생시켜야 할 가능성도 크다. 여성의 사회 참여는 계속 늘고 있지만 내 집 아닌 곳에서 여자가 살아남기는 아직도 힘든 세상이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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