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김덕호/´지문첨부´ 비자 美 오만의 극치

  • 입력 2002년 6월 1일 22시 58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국경보안 강화 및 비자 입국 개혁법’에 서명함으로써 미국이 더 이상 열린 사회가 아님을 증명해 보였다. 이 법은 미국에 입국하려는 모든 외국인에게 지문이나 눈의 홍채 사진이 첨부된 비자를 요구한다.

이 법안은 문명화된 모든 국가에서 당연시되는 무죄 추정의 원칙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매년 5억명이나 되는 입국자에게 범죄자에게나 적용하는 지문 날인을 어떻게 요구할 수 있겠는가.

놀랍고도 무서운 사실은 이런 비문명적 발상에 단 한 명의 상원의원(97 대0), 단 한 명의 하원의원(411 대 0)도 반대하지 않은 일이다.

이 일사불란한 의회와 행정부의 행동에서 나는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일찍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우려했던 ‘다수의 폭정’을 본다. 그는 영국과의 ‘1812년 전쟁’ 때 이에 반대하던 볼티모어의 한 신문사가 폭도들에게 습격 받고 언론인이 살해되어도 정부기관이 수수방관했던 일을 예로 든다.

사실상 그의 관찰은 옳았다. 미국 사회는 주기적으로 광기에 휩싸이곤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빨갱이 소동’이 그러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 이후의 매카시즘이 그랬다. 9·11 테러 이후의 상황도 유사하다.

작년은 미국인들의 자존심을 철저히 짓밟았던 일본의 하와이 공습 60주년이었다. 디즈니사는 ‘진주만’이라는 영화를 제작해 호호백발 참전용사들을 초대하는 등 전국적으로 애국심을 고취하고 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애국심이 적당히 무르익을 즈음 9·11 테러가 발생했던 것이다.

당시 미국에 체류 중이던 나는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던 미국인들의 애국심에서 무서운 구석을 보았다. 그들이 동조의 수준을 넘어 획일화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누구든 부시 행정부의 대 아프가니스탄 정책에 반대하거나 의구심을 나타내려면 사회적 매장을 각오해야 했다.

부시 대통령은 미국이 자유로운 나라이자 개방사회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많은 비(非) 미국인들은 앞으로 미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큰 요새로 둘러싸인 섬나라로 변할 것이며, 안보의 명분 아래 자유에 재갈을 물리는 폐쇄사회가 될 것으로 우려한다. 왜 테러 대상이 됐는지 상대방 처지에서 생각해보려 하지 않고, 자신이 당한 일만 생각하며 무조건 응징하려는 국가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베트남전에서 이길 수 없었던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미국의 오만이었다는 사실을 벌써 잊었는가.

이렇게 어리석고도 일방적인 독소조항이 개정 또는 폐지되지 않는 한, 나는 미국 땅에 발을 들여놓고 싶은 생각이 지금으로선 조금도 없다.

만약 우리 정부가 관광차 입국하는 미국인들에게 테러 발생에 대비해 지문 날인을 요구한다면 그들도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만약 그들도 동의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전 세계는 바야흐로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는 야만의 시대로 회귀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김덕호 한국기술교육대 교수·역사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