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의 현주소/전문가 기고]원리 모르고 수박 겉핥기

  • 입력 2002년 4월 22일 18시 42분


서울 강남의 일부 부유층에서 시작된 선행학습 관행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제는 전국 으로 퍼진 것 같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원교습이나 개인과외를 하고 있는데, 대부분 학교 진도보다 훨씬 앞서 나가는 선행학습에 매달리고 있다.

선행학습의 효과 여부는 많은 논란이 있다. 학부모나 학생들은 미리 배우고 또 학교에서 배우기 때문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지만, 학교 교사들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대충 배우는 것이 사실상 학습에 도움이 안되고 미리 배운 탓에 수업에 흥미를 잃어 분위기를 해치는 학생들이 많다고 불평한다.

이는 선행학습이 이뤄지는 과정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선행학습은 지독한 반복 학습이다. 방학 중에 다음 학기 동안 배울 내용을 다 배우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 다시 반복해서 배운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시험 때가 되면 시험 범위를 다시 한번 정리해 준다. 학교 수업에서도 배우니 많은 경우 한 학기에 같은 내용을 네번까지 배우는 셈이다. 당연히 성적도 높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도대체 한 학기 동안 차근차근 배워야 할 내용을 두달여의 방학기간에 끝내려면 아이들이 과연 제대로 이해나 하는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대개는 수박 겉핥기식으로 지나간다. 두번째 배울 때는 이미 배운 것으로 전제해 문제풀이 중심으로 진도를 나간다.

▼응용-창의력에 마이너스▼

그 과정에서 출제 빈도가 높은 문제에 익숙해질 수 있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문제풀이 연습은 원리를 묻거나 예상치 못한 유형의 문제를 만나면 여지없이 무너진다. 선행학습에 길들여진 학생들의 성적이 들쭉날쭉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선행학습으로 배우는 지식은 거의 출제 빈도가 높은 문제 중심의 발췌된 지식이다. 이런 공부에 익숙한 학생들은 설사 시험 점수가 높더라도 그 분야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가졌다고 보기 어렵다. 응용력 창의력은 물론 다음 단계의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기초나 자기주도적 학습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운좋게 대학에 들어가도 대학 이후의 단계에서 요구하는 학습을 따라가기 어렵고 결국 뒤처지게 된다. 단순한 추정이 아니라 국내외의 여러 사례에서 입증된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남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일찍부터 선행학습을 한 아이들은 성적 향상도 의심스럽고 혼자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더 이상의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는 국가 인적자원 개발의 측면에서도 심각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이종태 한국교육개발원 기획조정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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