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조기숙/이인제의 '빚'

  • 입력 2002년 1월 29일 18시 53분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후 나는 3년간 시간강사를 했다. 연구소에라도 취직하기 위해 뛰어 다니던 내게 동료들은 진심 어린 충고를 했다. 장관이나 청와대 등 배경이 될 만한 사람을 찾아보라고.

1990년 초만 해도 정치학 분야 국책연구소에 누구는 누구 연줄로 들어왔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인생의 첫 출발을 결국 언젠가 갚아야 할 빚으로 시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운이 좋아 공채로 대학교수가 된 나는 언론에 정치논평을 하면서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가끔 어떻게 그렇게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속시원하게 잘 하느냐는 독자의 칭찬을 들을 때, 나는 속으로 이렇게 답한다. “진 빚이 없거든요.”

▼'경선 불복' 과거 참회부터▼

민주당 경선주자들의 TV토론을 지켜보면서 나의 초년병 시절이 떠오른 이유는 일국의 대통령은 적어도 대통령이 되기 위해 빚을 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후보들이 젊어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빚이 적은 후보도 꽤 있었다. 하지만 몇몇은 대통령이 되면 어떻게 국정을 운영해 나가겠다는 다짐보다 어떻게 권력을 잡느냐에 더 관심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청와대의 각종 부패 연루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회복하고 더 나아가 국민참여 경선제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공정한 경선이 담보되어야 한다. 이는 다른 정당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한국 정당 발전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당내의 특정 계파가 경선 결과를 왜곡시켜서는 곤란하다.

며칠 전 귀국한 권노갑 민주당 전 최고위원은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특정 주자를 조용히 밀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권 전 위원이 이인제 상임고문을 민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정당인이 정치행위를 하는 것을 뭐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누가 누구를 민다는 것이 분명한 경우, 그 후보는 특정 계파에 빚을 지게 된다. 후보가 당선된 후 공약으로 내건 정책의 실행으로 갚을 수 있는 빚이라면 상관이 없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이권이나 인사에 대한 특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현 정부의 실패가 인사의 실패에서 비롯되었으며 인사에는 특정계파가 개입했다는 것이 당내 사람들의 주장이다. 이념이나 정책연대를 제외한 어떠한 연대도 국민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게다가 이인제 고문이 민주당 후보로 선출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이 고문은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참회하고 국민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 그는 지난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경선 결과에 불복한 이력이 있다. 여론정치는 민주정치라며 여론조사에서 당시 이회창 후보의 낮은 지지도를 불복의 근거로 제시했는데 이는 궤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여론조사로 후보를 선출하지 경선이라는 절차나 승복하겠다는 서약은 왜 필요한가. 둘째, 이 고문은 동교동계의 어떠한 지원도 없이 홀로 서겠다는 선언을 해야 한다. 민주당의 정당쇄신 결과 오늘날 경선이 열리게 되었는데 그는 이 과정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다른 후보들이 동교동계의 미움을 사면서 당 쇄신을 외칠 때, 그는 전국의 대의원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가 정당민주화의 물줄기를 이어갈 것이라는 확신을 국민에게 심어 주기 위해서는 동교동계와의 절연을 선언해야 한다. 셋째, 젊은 한국을 주창하는 후보로서 지역주의에 기대지 않겠다는 서약을 해야 한다. 이 고문이 3김을 만나러 다니고, 민국당과 자민련과의 3당 합당에 찬성하는 것은 지역주의에 기대 뭘 해보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세 가지가 선행되지 않고 이 고문이 후보가 된다면 세간에 떠도는 ‘이인제 필패론’은 현실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동교동 힘 빌리지 말라▼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한나라당과의 차별적인 대안을 바라는 국민에게 마음놓고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민주당의 의무다. 앞의 세 가지 과제가 선행되지 않은 채, 권 전 위원이 지난 대선에서 한나라당 경선주자였던 이인제 고문을 민다면, 이는 민주당원과 국민의 염원을 저버리는 행위다.

김대중 정부의 일부 개혁정책이 좌초한 원인 중 하나는 자민련 김종필 총재에게 진 빚 때문이다. 지역주의의 덕을 본 역대 대통령들의 인사정책은 편파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번 대선에서는 어느 당이건 더도 덜도 말고 빚 없는 후보가 대선 후보로 선출되기를 기대해본다.

조기숙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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