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칼럼]우리 동국이

  • 입력 2001년 9월 10일 16시 54분


축구 팬들은 1998년을 기억할 것이다. 늘 썰렁하다는 말만 듣던 축구장에 관중이 넘쳐 났으며, 각 신문과 방송은 앞을 다투어 축구를 다루었다. 미처 제대로 된 싹조차 틔우지 못했던 서포터스가 하나의 청년 문화로까지 급성장 했으며 축구는 당시 중고생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신드롬이기도 했다. 그 당시의 한바탕 난리 부르스가 일종의 탄력으로 작용했는지 지금의 축구장도 그다지 썰렁하지는 않다. 이제는 한 쪽 골대 뒤를 차지하는 서포터스가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있으며, 경기장을 찾는 고정 관중도 상당히 증가했다. 비록 1998년의 한바탕 바람몰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분명히 한국 프로축구는 하나의 전환기를 거치고 다소나마 업그레이드가 된 상태이다.

3년 전에 휘몰아쳤던 요란했던 바람… 그 뜨거운 바람의 정점에 있던 선수가 바로 이동국이다. 일찍이 포철공고 시절 고교무대를 평정했기 때문에 입단 전부터 관심을 모았던 선수였으며, 포항 스틸러스는 이동국이 고등학교 3학년이던 해에 입단 계약을 해 버렸다. 아울러 데뷔도 하지 않은 선수를 팀 홍보 포스터에 등장시켰으며, 홍명보의 등번호 20번을 미리 내정할 정도였다. 프로 입단 후에 행여나 문제가 생길까봐 고3 말미에는 자잘한 부상까지 미리 손을 보았다. 이동국은 그만큼 준비된 상태에서 데뷔를 했으며 1998년 월드컵의 절망 속에서 ‘희망’이라는 메시지로 팬들에게 다가서게 된다. 그리고 그 해에 한바탕 몰아쳤던 축구 르네상스의 주인공이 되었다.

당시의 이동국을 보는 시선은 매우 따뜻한 편이었다. 그 당시에도 이동국의 거품을 지적하는 말들이 있었지만 어느 정도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성적과 기량에 있어서 사람들은 합격점을 주었다. 위치와 각도를 가리지 않고 날리는 강하고 정확한 슈팅, 문전에서의 침착성과 대담성, 큰 덩치를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해 주는 타고난 유연성, 영리한 두뇌와 게임을 읽을 줄 아는 눈, 넓은 시야, 빠른 슈팅 타이밍…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경기, 결정적인 상황에서 확실한 매듭을 지어주는 모습으로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비록 미숙한 부분들이 있었지만 프로 1년차의 열 아홉 소년이 보여 줄 수 있는 모습 치고는 놀라운 것들이었다. 황선홍의 한 마디가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준다.

“난 저 나이 때 저렇게 못찼어요!”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의 이동국은 그리 따뜻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이런저런 문제점들을 달고 다니는 단점 투성이의 선수처럼 보인다. 공식 기록상으로 100미터를 ‘12초 땡땡’에 주파하지만 경기장에서 그의 움직임은 거북이다. 다른 선수들처럼 부지런을 떨지 않고 언제나 어슬렁거린다. 도무지 그는 바지런한 맛이 없다. 남들은 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왔다리 갔다리 하는데... 이 노무 자슥은 골에리어 부근에서 어슬렁 어슬렁 거리다가 콩고물이나 받아 먹는다.

요즘은 이 자슥도 스타 티를 꽤나 낸다. 팬들을 상당히 의식하는 꼴이 역력하다. 나이도 어린 것이 테레비발 신문발 몇 번 받더니만 인기에 맛을 들였나 보다. 한 술 더 떠서 모 연예인과의 응응응 소문까지 나돌았다. 급기야 어렵사리 진출한 독일 무대에서는 변변히 게임조차 뛰어 보지 못한 채 귀국하는 초라한 모습을 보이더니 국가대표 팀에서도 탈락했다. 포항 스틸러스로 복귀했지만 여전히 팀 공헌도는 그리 높지가 못한 상황이다. 설기현처럼 벨기에라도 가서 묵묵히 도를 닦을 것이지, 곧 죽어도 이태리나 스페인으로 가고 싶다니 이건 또 어찌 할꺼나!

차갑고 냉정하다. 사람들은 지금 이동국을 그렇게 보고 있다. 이제는 그의 당돌한 몸놀림과 강력한 슈팅에서 애써 눈을 떼려 한다고 표현할 만큼 사람들의 눈은 차갑다. 1998년에는 그의 거품과 실질적인 실력에 대해서 정확한 잣대를 대기 보다는 눈짐작에 의존했던 것처럼, 지금은 반대로 그가 가진 어떤 장점도 차가운 색안경으로 차단되는 실정이다. 역시 거품이었다, 발전이 없다, 꼴에 건방만 들었다, 더 이상 희망이 아니다, 그것이 그가 가진 재능의 한계이니 더 기대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그눔아 그런 거 진작부터 알았다… 등등

사람들이 말하는 이동국에 대한 장점과 단점은 모두 맞는 말일 것이다. 세부적으로 따져 보면 약간의 차이도 있고 약간의 편견도 있겠지만, 어쨌든 대체적인 평가는 비슷할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우리는 항상 지나치게 한 쪽으로 치우치는 실수를 자주 범한다. 좋을 때는 모든 것을 감싸주지만 일단 삐딱하게 찍히면 단점들만 물고 늘어지는 경향이 강하다. 쉽게 기대하고 쉽게 흥분하고 쉽게 자신감을 가지고… 반대로 쉽게 실망하고 쉽게 버리고, 또한 너무도 쉽고 당연하게 새 것을 찾는다. 장점이 발산될 때는 모든 것이 용서되지만 단점이 드러나면 지나치게 단점에 집착하기도 한다. 이동국을 바라보는 눈도 그와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단, 이동국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 높이를 맞출 필요가 있다. 나이 22살, 프로 4년차이며 대학 4년에 해당한다. 현 대표팀에서는 설기현, 박지성, 이천수와 함께 여전히 어린 축에 속한다. 황선홍, 김도훈, 최용수와 주전 자리를 놓고 다툼을 벌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으련만, 우리의 욕심은 그 정도의 이동국이 아니라 황선홍 조차 넘지 못했던 벽을 넘을 만큼의 이동국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는가 의심해 보자.

그에게는 여전히 다점들이 발견되고 있지만, 나름대로 꾸준한 발전을 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덩치와 스피드, 유연성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알게 되었고 과거에 비해 돌파력도 향상되었다. 특히 적극적으로 수비에 가담하고 공격할 때 파괴력을 내뿜는 부분은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브레멘에서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전반전에 비해 후반전의 몸놀림이 눈에 띌 만큼 차이를 보이는 것이 또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경기장에서의 자신감과 책임감도 변화된 부분 중 하나다. 데뷔 시절에는 포항 스틸러스에서나 대표팀에서나 막내둥이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그 스스로가 팀의 핵심 전력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설익은 에이스지만, 그는 에이스에 어울리는 것들을 요구 받고 있으며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 성장하는 모습이다. 아울러 이제는 프로 선수라면 누구나 겪을 수 밖에 없는 부상과 슬럼프도 경험하고 있다. 자기를 표현하는 것, 관리하는 것, 그리고 인정 받는 것. 서서히 그런 것들을 배워가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설기현과 이동국을 비교한다. 설기현처럼 바지런할 수는 없는지, 그처럼 ‘성실’이란 마크를 이마에 딱 부칠 수는 없는지, 욕심을 버리고 벨기에나 네덜란드에서 차근차근 시작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은지… 물론 설기현은 기특하고 대견하다. 속도는 느리지만 차근차근 성장해 가는 그를 바라보면 박수를 보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설기현이 모범 답안이기 때문에 이동국이 몹쓸 선수가 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설기현을 한껏 칭찬하고 격려해 주되, 그것이 빌미가 되어 이동국을 몰아 세우는 것은 고등학교 시절 2등 하던 놈이 1등 했을 때, 1등 하던 놈을 뒤지게 패대기 치는 것처럼 위험하게만 보인다.

1998년의 이동국은 멋 모르고 축구판을 휘저었다고 했다. 처음 프로에 올 때는 황선홍과 함께 뛰는 것 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낄 만큼 어렵게 생각했지만, 막상 게임을 소화하면서부터는 은근히 자신감이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이동국은 축구가 어렵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3년 전에는 쉬워 보였던 축구가 오히려 지금 어려워지는 현상… 그 사이에 여러 감독을 경험했으며, 찬사와 비난이 엇갈리기도 했고, 어떤 상대를 만났을 때는 무기력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러면서도 항상 자신에게 쏟아 지는 기대치를 어느 정도는 충족시켜 줘야 하고, 부상과 재활과 슬럼프를 겪어야 하고… 기타 개인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현재 그가 헤쳐 나가야 할 것들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우리 자신의 나이를 이동국과 같은 나이인 22살 시절로 좀 돌려 보자. 또는 19, 20살 시절에는 어땠는가? 우리는 성장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갈등과 좌절과 방황을 경험하면서 다시금 스스로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희망을 찾으려 하지 않았던가? 이성 문제와 군대 문제에서부터 국가관과 자기 철학에 이르기까지 그 당시의 우리들을 짓누르던 것들은 많았다. 물론 개중에는 설기현처럼 묵묵히 스스로를 연마할 줄 아는 기특한 친구들도 있었지만, 아마 대개의 사람들은 적잖은 술과 방황으로 그 시기를 때웠을 것이다. 그런 시기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의 잠재력과 희망을 인정하고 독려해 주는 손길, 애정어린 관심과 회초리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누구나 가져 보았을 것이다.

얼마간의 부상과 재활, 방황과 부진, 그리고 얼마간의 휴식을 마치고 이동국은 다시 프로 리그에서 뛰기 시작했다. 대표팀에서도 다시 한 번 기회를 얻었다. 이동국은 지금 성장통을 앓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선수들이 큰 선수로 거듭나기 위해서 겪어야 하는 하나의 고비인 셈이다. 아직은 그의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1998년에 보았던 기대와 희망이 거품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황선홍이 말했듯이 나는 그 나이 때 이동국처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동국과 함께 누릴 수 있었던 축구 르네상스와 그의 발에서 터졌던 골과 승리만으로도 지금까지 너무 행복했기 때문에… 우리 동국이가 지금의 고비를 잘 넘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자료제공: 후추닷컴

http://www.hooc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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