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닷컴 추천 새책]'이주헌의 프랑스 미술기행 '

  • 입력 2001년 7월 2일 10시 12분


“우리는 그 날을, 그 피로를, 그 스피드를, 그 신선한 공기를, 그 따뜻한 태양을, 땅 위에 날아가 박히는 그 태양의 광선을 즐겼다.”

<이주헌의 프랑스 미술 기행>(중앙 M&B 펴냄)은 콩쿠르 형제의 문장으로 시작하는 머리말부터 기자를 사로 잡았다. 독자 여러분과 함께 물어보고 싶다. ‘내 삶의 날들을, 그 피로를~’ 하나라도 즐기고 있는가.

미술평론가 겸 화랑 ‘학고재’와 ‘아트스페이스 서울’ 관장인 저자 이주헌은 콩쿠르처럼 하찮아(?) 보이는 피로, 공기, 태양을 즐겨보고 싶어 프랑스 미술 기행을 떠났다. 만약 독자께서 하찮은 걸 즐길 줄 아는 영혼을 갖고 싶다면 이 책을 놓치지 마시라.

빛과 아름다움에 취해 살아가는 프랑스 사람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 저자는 프랑스 미술가와 관련이 있는 14곳을 찾아 다니며 쓴 17개의 미술 에세이로 이 책을 꾸몄다.

로댕, 모네, 고갱, 쿠르베, 밀레, 고흐, 마티스 등 등장하는 십수 명의 미술가들은 저자가 불어넣은 생명의 기운을 받아 독자 앞에서 살아나고 미술가들의 고향, 아틀리에, 그림배경, 미술관 들은 사진을 곁들여 눈에 생생하게 잡힌다.

저자의 다른 저서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이 시키는 대로 유럽 여러 도시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좇아 다닌 적이 있는 기자는 저자처럼 체코 프라하에서 카메라를 잃어버린 특별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여행기 형식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프랑스 길거리와 기차 안에서 값싼 샌드위치를 씹어 넘기고 발바닥과 종아리가 뻐근하도록 발품을 팔아’ 만든 이 책에선 여행자만이 갖는 미묘한 단상을 맛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발로 뛰어 확인하고 쓴 글 덕분에 미술가들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작품 속에 배어 있는 역사적 상황을 드라마처럼 생생하게 살려내고 재는 체 하지 않으면서 솔솔 풀어 놓는 미술에 대한 전문지식, 그러면서도 삶과 예술에 대한 신뢰할만한 주관적 해석이 편편의 글에 녹아 있는 것도 이 책만의 장점이다.


‘빛의 마술사’ 클로드 모네의 예술 세계를 다룬 2장은 가장 인상적인 챕터였다.

말년에 모네가 저 유명한 수련 연작을 그렸던 마을 지베르니(파리에서 서쪽으로 70km)에서 저자는 모네의 아틀리에와 모네 예술이 완성된 연못 여기저기를 돌아보며 모네 예술의 ‘모든 것’을 들려준다.

연전에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소장된 가로 4.25~17m, 세로 2m 규모의 수련 연작 여덟편 앞에서 저자처럼 ‘그대로 물 속에 잠겨버리는 느낌을’ 경험했던 기자는 모네의 수련에서 관능까지 느낀다는 저자의 감성까지 모두 접수하긴 힘들지만, 모네의 예술성과 위대함에 대한 유려한 해석 만큼은 흠뻑 빨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상투적인 표현 같지만 '예술에 목마른 영혼'에게 그것은 단비였다.

고갱을 다룬 장 '원시의 꿈과 자유를 찾아 떠돈 영혼’에선 앙상한 독서이력이 만들어놓은 고갱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져 나가는 고통스런 환희를 맛볼 수 있었다.

아마추어 티를 다 씻어내지 못한 30대 후반의 고갱이 머물렀던 퐁타방(프랑스 북서쪽 브르타뉴 지방)을 둘러보고 쓴 이 글에서 저자는 고갱에게서 제국주의적 성향을 집어내는 것이 아닌가.

고갱은 “문명의 손길로부터 나 자신을 자유롭게 지키기 위해” 원시로 떠났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가 살았던 그 시대 제국주의적 정복과 식민화의 흐름에 동조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자세한 설명을 들어보시라.

“고갱의 여인들이 늘 타자, 혹은 객체의 인상을 풍기는 것도 이런 의식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고갱은 그들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았다. 비록 그들의 원시성을 예찬했지만 그들은 ‘문명인’ 혹은 ‘탐험가’ 고갱에 의해 철저히 관찰되고 파악되는 대상적 존재에 불과했다. 그의 그림에서 그들 자신의 진솔한, 직접적인 목소리는 결코 들리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갱은 또 당시 파리의 부르주아들이 식민지들과 연관해 갖고 있던 막연한 이국 취향과 호기심을 상당히 의식하고 있었다.”

반 고흐가 마지막 10주를 살았던 오베르(파리에서 서쪽으로 35km) 챕터에서는 고흐의 말년 작품과 그것의 실제 배경이 된 곳의 사진을 나란히 보여준다. 차가운 색과 따뜻한 색의 충돌이 더이상 조화로울 수 없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포함해 ‘오베르의 거리와 계단’ ‘오베르 시청’ ‘오베르의 교회’ 등이 그것이다.

사진과 그림의 차이를 대조하면서 저자는, 대상의 외형을 충실히 표현하기보다는 화가 내면의 감정과 느낌을 우선적으로 표출한 반 고흐의 모든 그림을 자화상이라고 규정한다.


이밖에도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으로 유명한 해안 도시 칼레, 모네가 연작으로 그린 대성당과 미소 짓는 천사상을 볼 수 있는 랭스, 원시 미술의 대표로 꼽히는 동굴 벽화가 있는 라스코 동굴, 마티스의 빛의 예술을 낳은 지중해안 니스, 지평선의 작가 밀레의 ‘만종’ 무대가 된 바르비종의 샤이 들판, 예술적 향취가 숨쉬는 파리의 묘지를 따라가다 보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예술가들의 숨결이 독자에게 훅 끼쳐 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얼마나 행복한 경험인가. 356쪽. 1만8천원.

☞ 도서 상세정보 보기 & 구매하기

김태수<동아닷컴 기자> ts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