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경 기자의 시네닷컴] 올 여름의 헤라클레스들

  • 입력 2000년 7월 23일 19시 17분


현실에서 '강한 남성'에게 매료되어 본 적은 없지만 영화에서 '강한 남성'을 보는 일은 즐겁다. 고통으로 가슴이 찢겨나가도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는 웅혼을 간직한 남성, 영웅적 고뇌가 깃든 깊은 눈매와 나직한 바리톤 음성을 지닌 남성을 스크린에서 만나는 체험은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지.

'글래디에이터'가 서울관객 100만명이 넘는 대흥행에 성공한 것도 스크린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강인하고 고귀한 남성상을 되살려놓은 러셀 크로의 매력 때문 아닐까. 내 주변엔 막시무스 장군 역을 맡은 러셀 크로 때문에 이 영화를 또 보고, 그의 사진을 책상 머리에 붙여놓은 열성 팬들도 있다.

영화마다 편차는 있지만 '글래디에이터'와 '패트리어트' '퍼펙트 스톰'까지 올 여름 스크린에는 유난히 강한 남성들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올 여름의 영웅담은 특히 잔혹하다.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 장군이 가는 곳마다 참혹하게 동강난 몸통과 으깨진 뼈들이 산을 이룬다. 병사들의 목이 날아가고 사지가 처참하게 절단나는 '패트리어트'의 전쟁터에서 영웅 벤자민 마틴은 장총과 손도끼를 들고 피투성이가 되어 으르렁거린다.

이들은 오랜만에 스크린에 돌아온 헤라클레스들이다. 날로 시스템화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원시적 공격성을 거세당한 채 적당히 타협하고 체념하며 살아가야 하는 현대를 남성성에 대한 위기의 신호로 보기라도 한 것일까.

영웅담과는 거리가 멀지만 '퍼펙트 스톰'에서 빌리 선장이 남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위험한 바다에 나간 것도 그의 남성성에 대한 도전 때문이다. 빌리 선장에겐 다른 선원들처럼, 애인과 새출발하기 위해 또는 이혼한 전처가 키우는 아들 양육비를 대기 위해 돈을 마련해야 한다는 절박한 동기가 없다. 실적이 낮으니 실적 좋은 여자 선장 꽁무니나 따라다니라는 선주의 비아냥이 긴 슬럼프에 빠진 그의 남성성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가 아내와 아이들까지도 자신의 손으로 죽여버리는 난폭한 자였던 반면, 이들은 가족을 사랑하는 헤라클레스들이다.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 장군의 거친 복수심을 지탱해준 건 한없이 부드러운 가족애였다. 가족을 앗아간 자들에 대한 원한에 사무쳐 집요한 복수의 장정에 오른 막시무스 장군은 밤이면 촛불을 켜고 죽은 아내와 아들을 그리워 한다.

'패트리어트'에서 전쟁에 뛰어들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던 벤자민 마틴을 전장으로 내몬 것 역시 자식에 대한 사랑이었다. "자식이 내 신념"이라고 말하던 그는 아들의 억울한 죽음 앞에 총칼을 들고 복수심에 불타는 영웅이 된다.

2000년에 스크린에서 부활한 새로운 영웅들이 받은 신탁은 이념적 대의가 아니라 가족이다. 뒤를 이어 공화제의 이상을 실현시키라는 황제의 부름에도,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함께 싸우자는 군대의 요청에도 흔들리지 않던 이들이 가장 잔인한 죽음의 사자가 된 건 가족에 대한 애절한 사랑 때문이었다. 가족을 아끼는 강한 남성에 대한 찬미는 어쩌면 날로 심해지는 가족의 해체와 남성성의 위기에 대해 할리우드가 내놓은 모범 답안인지도 모르겠다.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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