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곳에선]이재호/「오만의 나라」美國

  • 입력 1997년 10월 4일 20시 16분


「냉전 종식 이후 미국 의회가 한 일이라곤 세계 도처에 미국의 적(敵)을 만든 것뿐」이라는 얘기가 있다. 기회만 있으면 특정국가들을 제재하는 법을 만들어 이들로 하여금 미국에 등을 돌리게 했다는 것인데 요즘 미국 대외정책의 특징을 한마디로 압축한 재치있는 표현이다. ▼ 공허한 「평화 슬로건」 ▼ 미국은 확실히 제재 만능의 시대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한국의 자동차시장에 대해 슈퍼301조를 발동한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아시아 유럽 중남미 나라치고 미국으로부터 제재 위협을 받지 않은 나라가 드물 정도다. 헬름스―버튼법(法)이 한 예다. 쿠바에 동결돼 있는 미국자산에 투자하는 나라를 제재하겠다는 법으로 캐나다와 유럽연합(EU)은 쿠바에 진출하지 못하고 있다. 다마토법(法)이란 것도 있다. 이란과 리비아의 유전산업에 4천만달러 이상을 투자하는 외국기업을 제재하겠다는 법이다. 유엔이 이들을 테러국가로 규정했지만 금수조치까지는 취하지 않았는데도 미국이 그렇게 강제하고 있는 법이다. 「종교 박해 금지법」도 추진하고 있다. 종교적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특정 집단을 박해하는 국가를 제재한다는 것이 법안의 골자다. 낙태를 국제적으로 금지하기 위한 입법 움직임도 구체화되고 있다. 낙태 허용 국가에는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것인데 역시 핵심은 제재다. 제재의 슬로건은 항상 도덕적이다. 쿠바의 공산독재를 응징하기 위해서이며 국가 테러활동을 막기 위해서다. 이런 슬로건들이 과연 얼마만큼 진실된지는 알 수가 없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자국(自國)이기주의에 대한 이념적 포장(包裝)처럼 비쳐지기도 한다. 제재 위주의 대외정책은 힘과 오만함에서 나온다. 소련제국 붕괴 이후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힘, 그리고 『미국이 말하면 누구든 듣게 돼 있다』는 오만함이 워싱턴에 깔려있다. 또이게 「미국의소리」(Voice Of America)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책수단으로서의 제재의 효용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것은 달라진 국제사회의 환경 때문이다. 이념이 사라지고 경제적 이윤추구가 국익의 핵심이 된 상황에서 교역은 어떤 나라에나 중대사다. 그것을 특정국가가 막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프랑스가 정면으로 반발했고 캐나다와 EU는 이미 헬름스―버튼법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했다. 그런데도 제재를 고집하는 것은 역시 오만 때문이다. 미국의 오만함은 통상정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미국의 슈퍼301조 발동에대해갖게 되는의문은 「WTO라는 다자체제 아래서 미국이 과연 슈퍼301조라는 양자적 보복수단을 사용할 명분과 권리가 있느냐」이다. ▼ 비판받는 제재만능주의 ▼ 예일대 경영대학장이며 클린턴행정부에서 상무부차관을 지냈던 제프리 가텐교수는 『당연히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이 슈퍼301조를 휘둘러 개별국가들의 시장을 개방해 나가는 것이 오히려 WTO체제의 정착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쯤되면 오만함의 극치다. 미국의 통상 전문지인 저널 오브 커머스는 3일자 사설에서 미국의 제재만능 대외정책을 비판하며 『이런 식으로 나가면 앞으로 10년후에 미국의 친구는 하나도 없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이 비단 한국에 대해 슈퍼301조를 발동했대서가 아니라 미국은 이런 경고에 한번쯤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재호<워싱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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