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세상/한 영화 두 소리]‘연인’을 보고

  • 입력 2004년 9월 22일 16시 38분


코멘트
●장이머우, 역사로부터 도망하다

▽심영섭=내가 ‘연인’에 대해 도무지 동의할 수 없는 해석이 뭔지 알아. 바로 이 영화가 정통 중국무협영화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거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중국식으로 흉내내려다 보니 무협의 외피를 썼을 뿐이지, 난 이 영화가 편집이나 영화의 화술면에서 정말 할리우드적이라고 생각해.

▽남완석=난 오히려 이 영화가 장이머우가 오매불망 만들고 싶어했던 러브스토리라고 생각해. 그런 면에서 영화의 시대 배경이 ‘당(唐)’으로 설정돼 있지만 사실 당이 아니라 다른 어떤 시대라고 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어. 그렇다면 왜 장이머우가 역사로부터 도망쳤을까? 전작 ‘영웅’이 나왔을 때 칸 영화제에서는 상영반대 시위도 벌어졌잖아. 중화주의(中華主義)의 노골적 표현이라고…. 그때 장이머우가 알아차린 것 같아. 전 세계에 통용되는 중국식 블록버스터를 만들어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사로운 얘기로 가야 한다. 그래서인지 주인공들은 모두 사랑에 눈이 멀어.

▽심=그렇지. 눈이 멀지. 이 영화 도입부 콩알을 던져 북을 맞히는 게임 이름의 영어 번역이 메아리 게임이야. 그게 뭐겠어? 마음을 던진 그 자리에 가 보면 이미 그 사람은 없고, 그리하여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상대를 끊임없이 쫓아가는 메아리 잡기 같은 거 그게 사랑이라는 거지. 장이머우의 장쯔이에 대한 사랑과도 같이 말야. (웃음)

▽남=멋지긴 한데 과잉해석 아냐? 그리고 확인 안 된 (연애)사실을 평론가가 말해도 돼? 게다가 메이(장쯔이)와 진(진청우)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잖아.

▽심=그래도 여자는 결국 죽어가. 끝까지 제자리를 지킨 리우(류더화)는 살고. 장이머우가 얘기하는 사랑의 본질은 그런 거야. 진의 가짜 이름이 수풍이라거나, 메이가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거나…. 잡을 수 없고 이룰 수 없는 게 사랑이라는 거지. 유치해 정말.

●마음의 풍경을 버린 장이머우

▽심=난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소리’라고 생각해. 장쯔이가 왜 맹인 무희로 설정됐을까. 그건 청각적인 집중도를 높이기 위한 거야. 모란각이라는 기생집에서 메이가 춤을 출 때 머리 장식이며 옥으로 만든 발들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클로즈업 되잖아. 거의 청각적 애무에 가까워. ‘영웅’에 비해 훨씬 강도 높게 소리들이 관능적으로 쓰이고 있어. 일종의 시각과 청각, 이미지의 협공인데 결국은 이미지의 전시장으로 전락하고 말지.

▽남=소리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데는 나도 동의해. 사실 전작 ‘영웅’에서도 사원에서의 대결 장면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죽여주지. 난 이 영화에서 장이머우가 관객에게 정서적인 충격을 주기 위해 시각과 청각으로 영화적 기술을 마치 폭탄처럼 쏟아 부었다고 생각해. 그 사원 결투 장면을 뻥튀기 한 게 바로 ‘연인’이야. 내가 장이머우에게 점수를 준다면 등장인물들의 내적인 심리상태와 색깔이 연관된다는 거야. 하얀 들꽃 밭에서 서로의 경계심이 풀어지고, 반대로 푸른 대나무 숲에서는 원래의 대의명분을 회복한다는 식의….

▽심=이 영화의 비주얼이 ‘마음의 풍경’을 쫓아간 것이라고? 동의할 수 없어. 비도문의 본거지인 대나무밭을 예로 들어 보자구.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에서 대나무밭은 저우룬파가 장쯔이에게 중용의 도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가르쳐주는 곳이지. 저우룬파는 대나무 위에서 균형을 잡는데 장쯔이는 미끄러져. 그런데 이 영화의 대나무밭은 그런 내면의 공간이 아냐. 대나무로 만든 창들이 메이와 진을 표적삼아 대나무가 빼곡한 숲에 45도 각도로 쏟아지는 장면 있잖아. 그건 오로지 장이머우가 바라는 기하학적인 구도를 표현하기 위한 장면이야.

▽남=당신은 처음부터 ‘연인’이 무협영화가 아니라고 정의해 놓고는 왜 자꾸 ‘와호장룡’ 같은 무협에 빗대어 비판하는 거야? 처음부터 장이머우가 할리우드 영화를 만들려고 한거라며? 그럼 됐지, 뭘 더 바래? 이 영화의 무협 신들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인 ‘매트릭스’에 가까워. 이 영화에선 말야, 칼이 무언가를 베지 않아. 총알처럼 날아가서 박힌다고. 칼싸움이 아니라 총싸움을 하는 거야 주인공들이. 또 갑자기 핸드헬드 카메라가 싸움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버려. ‘연인’은 전통적인 중국 무협영화처럼 싸움을 관찰자적인 시선에서 바라보지 않아.

●중국형 블록버스터의 미래?

▽심=내가 못마땅한 건 무협영화가 아니면서 무협 흉내를 엄청나게 냈다는 것 때문이지.

▽남=그건 바로 중국형 블록버스터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고민한 데서 나온 것 아닐까? 할리우드의 ‘매트릭스’가 총알을 쓴다면 중국이 쓸 수 있는 게 뭐겠어? 칼이야. 날아가는 칼. 그게 중국적인 특수성이라면 전 세계에 먹힐 만한 보편성의 언어는 바로 메이와 리우, 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아니겠어? 동양 무협은 서양에 가장 잘 먹히는 소재야. 전 세계에 통용되는 무협을 고민하는 한국영화계에서도 장이머우의 선택에 대해 고려해야 한다고 봐. 요번 칸 영화제에 초청된 건 다름 아닌 한국 무협영화 ‘청풍명월’이었어.

▽심=그래도 난 여전히 정통 무협을 지향하면서도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 중국 무협영화의 와이어 액션은 선(線)의 미학이야. 근데 ‘연인’에서는 선과 면을 다 잘라버려. 중국 무협영화의 전통이란 게 뭐야. 복수를 하지만 쓸쓸한 거, 그렇게 자기를 비워가는 거 아냐? 그런데 이 영화는 반대야. 자기를 비워가는 주인공의 마음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시각적 완성을 위해서 화면을 숨막히게 꽉꽉 채운다고. 그래서 한때 중국 5세대 영화감독의 신화였던 장이머우의 본질은 무엇인가, 자꾸 반문하게 돼.

▽남= 왜 꼭 한 감독이 한 가지 색깔만 가져야 하지? 왜 꼭 감독을 작가주의적인 관점에서 봐야 하냐고. 난 그런 점에서는 장이머우에 대한 평가도 조금은 유예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 3년쯤 지나고 보면, 우리가 고전 영화를 볼 때처럼 지금 이 영화의 숨가쁜 속도가 아주 평범하게 여겨질 지도 몰라. 물론 이 영화가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 너무 기름져서 관객을 숨 못 쉬게 몰아붙이는 건 나도 마음에 안 들지만 말야.

정리=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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