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칼럼]이영훈 e비즈니스 컨설턴트/대기업출신 경영자의 함정

  • 입력 2001년 2월 19일 13시 23분


벤처 열풍이 꺼져가던 작년말 수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는 것을 목격했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끌었던 것은 창업 수개월만에 문을 닫는 벤처기업들의 공통점이었다. 이러한 기업들은 주로 대기업 출신 인력들이 창업했으며, 제조업 등 생산기반을 갖추기 보다는 법률 세무 마케팅 광고 홍보 등 컨설팅업종이었다는 점이다.

창업 초기에는 자신만만하게 출발했던 기업들이 왜 그렇게 빠른 시간내에 문을 닫고 말았을까.

영업력의 부족이나 비즈니스 모델의 한계 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패한 경영자들을 만나보면 공통적으로 대기업과 벤처는 근본적으로 다른 경영문화를 갖고 있었고 이에 적응하는데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대기업 출신 벤처경영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을 필자의 경험을 통해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체면을 버리라는 것이다. 한국의 경제구조에서 중소기업은 주로 대기업의 주문을 받아 하청생산을 하는 경우가 많다. 벤처라고 예외는 아니다. 일찌감치 코스닥에 등록돼 자산가치가 대그룹 규모를 넘어섰다는 유망 벤처기업들도 사업구조는 하청납품식인 경우가 많다.

이를 대기업 출신 벤처 임직원의 입장에서 보면 신분이 ‘갑’에서 ‘을’로 바뀌게 된 셈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동료, 선후배로 막역히 지내던 사람을 이제는 접대해야 하는 위치가 된 것이다. 상당수 벤처기업인들은 초창기에 신분이 바뀐데서 오는 ‘자괴감’을 떨치기 힘들었다고 호소한다.

체면을 버리라는 것은 인간다움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사업은 사업이고, 우정은 우정이다. 대기업을 박차고 나왔을 때의 헝그리정신을 되살려 보다 냉철히 비즈니스를 펼쳐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초창기의 작은 성공에 낙관하지 말고 홀로서기를 서두르라는 점이다. 열심히만 한다면 창업 초기의 기업들이 10~20% 정도의 성장이나 순익율을 올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특히 법관이나 공무원이 퇴직후 누린다는 ‘전관예우’나, 새로 문을 연 점포에서는 축하인사로 물건을 사주는 ‘개업인사’의 전통이 남아있는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문제는 축제가 생각보다 빨리 끝난다는 점이다. 창업 2년차부터는 홀로서기에 나서야 한다. 부지런히 영업기반을 닦고 비즈니스 모델에도 허점은 없는지 재점검해야 한다. 벤처시장에서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점점 심화되고 있다. 덩치가 큰 놈이 살아남는다는 ‘규모의 경제(Economics of Scale)’도 대기업시장에서만 통하는게 아니다.

조프리 무어 교수는 ‘벤처마케팅’에서 벤처기업들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대중화하는 단계에서 ‘캐즘(Chasm)’을 경험한다고 지적했다. 캐즘이란 일종의 혁신자 시장과 대중시장사이에 놓여있는 단절이다. 이 간극을 뛰어넘으려면 팽팽한 가속도가 필요하고 그것은 남들보다 한발 앞서가는 성장속도다.

셋째, 임직원에 대한 보상이 빨라야 한다는 점이다. 벤처인치고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기까지 씀씀이를 아끼고 불철주야 일할 각오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장 사업성과가 가시화되지 않더라도 언제까지고 동료들과 동고동락할 자세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대기업 출신 벤처인들은 대개 ‘생활의 어려움’을 겪어 보지 못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성과에 대한 보상에도 조급한 특징이 있다. 더욱 큰 문제는 가족들이다. 작년말 시장전망마저 어두어졌을 때 대기업으로 U턴했던 사람들의 공통된 이야기가 있다. “나는 좀 더 견디고 싶었는데 아내와 자식들의 눈치가 보여 결국 원대복귀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벤처는 소폭의 성장이 아니라 폭발적인 성장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넷째, 시스템에 대한 환상을 버리라는 점이다. 일을 체계적으로 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대기업에서 하던 방식으로 업무를 처리하는게 곧 체계적이라고 생각하는 벤처인들을 자주 본다. 그러나 대기업식으로 일한다는 것이 혹시나 대기업에서 가지고 있는 비효율성을 그대로 반복한다는 것은 아닐까.

대부분의 벤처기업들은 일단 임직원의 숫자가 적어 대기업식의 시스템을 갖추기에는 무리인 경우가 많다. 업무를 대기업식으로 진행하다가 벤처기업의 생명인 ‘스피드’를 잃어버리는 사례도 자주 본다. 벤처기업에 적합한 경영방식과 시스템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분석하고 적용할 필요가 있다.

다섯째는 공동체 의식을 빨리 버리라는 것이다. 주식시장의 거품제거와 함께 벤처성공의 환상이 꺼지며 인력유동이 극심해지고 있는 추세다. 일반인들사이에서도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고 있다. 벤처경영에서도 누구를 채용하느냐 못지않게 어떻게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떠나보내느냐는 ‘아웃플레이스먼트(Outplacement)’가 중요해지고 있다.

한동안 한국인에게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게 금과옥조였다. 벤처에서는 이 명제가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다’로 바뀌어야 할 것 같다. 과거의 철밥통을 깨고 서로가 능력과 비전을 키우되 필요한 경우엔 다시 모여 시너지를 내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CEO의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인식해야 한다. 지금 벤처시장은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와 같은 형국이다. 거친 바다에서 선장의 정확한 판단과 방향제시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올해도 수많은 벤처기업들이 창업되고 또 폐업할 것이다. 흔히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지금 창업을 꿈꾸고 있는 예비 벤처인들은 선배들의 성공 못지않게 실패경험에도 많이 귀기울였으면 한다.

<이영훈씨 약력>

-전 한국경제신문기자

-전 마이스터컨설팅 팀장

-e비즈니스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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