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97>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1월 3일 18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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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그들 엄청난 대군이 산과 들을 덮으며 외황현(外黃縣) 경계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군사를 이끌고 앞서 가던 장수가 한왕 유방의 중군에 사람을 보내 급하게 알려왔다.

“앞에 서초(西楚)의 대군이 길을 막고 있습니다. 기세가 제법 날카롭습니다.”

“낙양에서 천리 길을 무인지경 지나오듯 했는데, 아직도 초나라에 감히 우리 대군의 길을 막을 군사가 남았단 말이냐? 우리 기치만 보고도 모두 거미새끼들처럼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지 않았느냐?”

한왕이 가소롭다는 듯 그렇게 물었다. 전갈을 가지고 온 군사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알아보니 두 갈래 군사가 합쳐 세력을 키운 것 같습니다. 한 갈래는 고양(高陽)을 지키던 초군(楚軍)들로 왕무(王武)란 장수가 이끌고, 다른 한 갈래는 수양(휴陽)을 지키던 군사들로 정거(程d)란 장수가 이끌고 있습니다. 아마도 홀로 대왕께 맞설 자신이 없는 왕무가 싸워보지도 않고 팽성으로 달아나다 정거를 꼬드겨 대왕께 맞서 보기로 한 듯합니다.”

“그렇다면 전군(前軍)은 무얼 하느냐? 단숨에 쓸어 대군의 길을 열어야 하지 않느냐?”

“실은 전군 선봉이 이미 한번 부딪혀 보았습니다만 뜻과 같지 못했습니다. 아장(亞將) 둘과 도위(都尉) 하나, 중연(中涓) 하나가 죽고 선봉군의 태반이 꺾였습니다. 알고 보니 우리 적은 전군보다 많은 5만 대군이라 합니다.”

그래도 한왕은 느긋하기만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10만을 보내면 되겠구나.”

그렇게 대답하며 긴장하는 빛이 조금도 없었다. 그때 대장군 한신이 나섰다.

“병진(兵陣)은 반드시 머릿수가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한번 싸움에 져서 기세가 꺾인 군사로 사나운 적을 맞을 때에는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싸움도 없이 머릿수로만 거기까지 밀고 온 다른 장수들은 한왕과 생각이 다름없었다. 그들 중에서도 번쾌가 큰칼을 차고 나서 소리쳤다.

“비록 한 싸움을 이겼다고는 하나 적은 우리 기세에 겁먹고 쫓기던 군사들입니다. 거기다가 50만 대군이 뒤를 받치고 있는데 겁낼 게 무에 있습니까? 제게 군사 3만만 주시면 왕무와 정거를 사로잡고 우리 대군의 길을 열겠습니다.”

“번 낭중기장(郎中騎將)이면 넉넉히 그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 중군에서 3만을 갈라 줄 터이니 어서 과인의 앞을 막는 적을 흩고 길을 열라!”

한신을 제쳐놓고 한왕이 그렇게 흔쾌히 번쾌의 출정을 허락했다. 한신을 대장군으로 세운 뒤로는 별로 없던 일이었다.

지난해 호치현에서 장평과 싸울 때 번쾌는 가장 먼저 성벽 위로 뛰어올라 현령(縣令)과 현승(縣丞) 한 사람씩을 베어 죽이고, 적병 11명의 목을 잘랐으며 20명을 포로로 잡아 낭중기장에 올라 있었다. 그 뒤로도 여러 싸움에서 용맹을 떨쳐 모두 번쾌가 이길 줄 믿었으나 한신의 얼굴은 알아볼 만큼 어두워졌다.

(무언가 좋지 않다. 난조다……내 불길한 예감이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가.)

오래잖아 3만 군사를 이끌고 기세 좋게 중군(中軍)을 떠나는 번쾌를 보며 한신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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