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79>卷四. 흙먼지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0월 13일 18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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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일손이 멈춰지고 구덩이 바닥에 함께 있던 초나라 군사들이 줄지어 구덩이 밖으로 기어오르자 비로소 제나라 항병(降兵)들도 퍼뜩 정신이 든 듯했다. 무엇에 홀려 있다 깨어난 사람들처럼 화들짝 놀라며 사다리 쪽으로 몰려들었다.

“저희도 잠깐 나갔다 오면 안 될까요?”

“나도 저 밖에 볼일이 있는데….”

자기들의 운명을 어렴풋이 예감한 포로들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사다리 끝을 움켜잡고 위로 올라가고 있는 초나라 군사들을 올려보았다. 그러나 초나라 군사들은 이미 받은 명령이 있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구덩이 바깥으로 기어나가기 바빴다.

더욱 불안해진 포로들은 아직 남아있는 초나라 군사들의 옷깃을 부여잡고 애걸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초나라 군사들은 저마다 칼을 빼들고 소리쳤다.

“물러나라! 우리는 되돌아 올 것이다. 너희들도 일을 마치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그러나 그때 이미 포로들은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초나라 군사들이 목숨을 건져줄 끈이라도 되는 듯 사다리 주변으로 모여들어 그들에게 엉겨 붙으려 했다.

마지막까지 바닥에 남아있던 초나라 군사들은 한손으로는 사다리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칼을 휘두르며 밖으로 기어 나왔다. 밖에 있던 초나라 군사들이 흔히 진과(秦戈)라고 불리는 낫 달린 창이나 기마병과 싸울 때 쓰는 긴 창으로 구덩이 위 언덕에서 그들을 도왔다. 뒤따라 올라오는 제나라 항병들을 무자비하게 찌르고 찍고 베었다.

그러자 구덩이 바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사다리를 오르려하다 창칼에 찍혀 다치거나 죽은 항병들이 사다리 근처를 시뻘겋게 뒤덮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기를 쓰고 사다리를 기어오르다가 다시 창칼에 찔려 떨어지며 구슬픈 비명을 질러대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올라가기를 단념하고 위를 향해 소리소리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자들도 있었다. 체념한 듯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짓기도 하고, 구덩이 바닥에 실성한 듯 퍼질러 앉아 무언가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웅얼대기도 했다.

그런데 다시 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어느새 전갈을 받은 후진(後陣)에서 마른 생선 두릅 엮듯 줄줄이 묶은 항병들을 끌고 왔다. 아무것도 모르고 거기까지 끌려온 항병들은 언덕 위에 줄지어 세워지고서야 자신들이 어디에 와 있는지 알아차렸다. 발아래 길고 깊게 입을 벌리고 있는 구덩이만으로도 눈앞으로 다가온 죽음을 한순간에 절감케 했다.

그제야 새로 끌려온 항병들도 구덩이 아래쪽과 마찬가지로 저마다 죽음을 앞둔 생명의 처절한 안간힘을 펼쳐보였다. 그러나 몸부림쳐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을 끌고 온 초나라 군사들이 발로 차고 창대로 후려치자, 줄줄이 묶인 채로 구덩이 바닥에 처박히며 이미 펼쳐진 아비규환에 새로운 지옥도(地獄圖)를 보탤 뿐이었다.

뒤이어 임치(臨淄) 부근에서 뻗대다 사로잡힌 제왕(齊王) 전영의 잔병(殘兵) 9000명이 모두 산 채로 구덩이에 던져질 때까지 그런 참극이 몇 차례고 되풀이되었다.

나중에는 구덩이가 내던져진 사람의 몸으로 채워져, 묶이지 않은 자들은 그들을 딛고 언덕 위로 기어오를 수도 있었으나, 누구도 살아서 구덩이 밖으로 기어나가지는 못했다. 언덕 위에 기다리고 있던 초나라 군사들의 창칼이 그들을 난자했기 때문이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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