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여자의 사랑 (72)

  • 입력 1997년 3월 18일 07시 59분


가을이 깊어지는 동안 〈27〉 그때 사고는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그때 졸병은 매복 훈련을 나갔었고, 그곳에 묻혀 있던 미확인 지뢰를 밟았다. 그날 저녁 졸병은 찢기고 다친 몸으로 바로 사단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혈액형은 O형이라고 했다. 연락을 받고 부대의 동료들이 한 차 가득 트럭을 타고 병원으로 나갔을 때, 군의관은 헌혈을 할 필요도 수혈을 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그가 몸을 찢긴 다음 죽기까지 얼마큼 시간이 걸렸는지 알지 못한다. 새벽에 보초를 나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불침번을 서던 병사가 그가 죽었다고 말했다. 직접 연락을 받은 것이 아니라 부대 상황실에서 들은 얘기라고 했다. 유서도 없었고, 남긴 이야기도 없었다. 아마 그 졸병은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하라고 말했다면 여자에 대해서 말했을 것이다. 언제나 그 졸병에게 여자는 기쁨이었다. 힘든 훈련도, 악착같은 시간도 그는 자기 마음 속의 여자로 버텼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나중에 그것을 버티지 못했던 것은 여자였다. 지금도 여자는 그것을 버티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땐 고마웠어요』 라고 여자가 말했다. 그는 여자가 말하는 그때가 어느 때인지, 그리고 어떤 일을 두고 하는 말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알기에 이번에도 그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커피잔만 두손으로 감싸안듯 만지작거렸다. 『그 친구는 잊었습니까? 이제…』 한참 후에야 그가 여자에게 물었다. 『…예』 여자는 한참 후에야 대답을 하고 나서, 다시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 『아주 다 잊은 건 아니지만요』라고 말했다. 그는 마음 속으로 그 친구의 어떤 부분이 아직 여자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것일까를 생각했다. 함께 했던 시간, 혹은 자신이 훼손시켰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녀의 몸과 마음에 입력되었던 죽은 그의 숨결 중 어느 쪽이더라도 그는 단지 지금 그 일과 자신이 상관없기를 바라는 마음일 뿐이었다.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예전, 여자에게 그녀가 사랑했던 한 남자의 기억을 훼손시키며 그가 여자에게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여자가 찾아왔고, 이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분위기 속에 어색한 자세로 마치 그 어색함을 깊이 탐색하듯 마주 앉아 있는 것이었다. 『며칠 전 우연히 김운하씨에 대한 이야길 들었어요』 <글:이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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