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실험실]독서공간 마련된 대형서점에 ‘공부族’이 자리 깔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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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 광화문점 안 수험생’ 가설과 검증

12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 내부 모습. 책상, 테이블, 조명 등을 설치해 책을 읽는 문화공간을 표방하는 서점이 늘면서 서점에서 수험서, 토익책을 보는 ‘공부족’도 생겼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12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 내부 모습. 책상, 테이블, 조명 등을 설치해 책을 읽는 문화공간을 표방하는 서점이 늘면서 서점에서 수험서, 토익책을 보는 ‘공부족’도 생겼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Ⅰ 서론

“요즘 서점에도 ‘공부족’이 산다던데….” 출판사 대표 A 씨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실제 요즘 대형서점들이 ‘책을 파는 상점’에서 ‘책을 읽는 문화공간’으로 전환하려는 시도가 활발하다. 연간 이용객이 1000만 명인 교보문고 광화문점은 올 초 곳곳에 책을 읽을 수 있는 의자와 책상을 배치했다. 80명 이상 앉을 수 있는 길이 11.5m, 폭 1.5∼1.8m 독서테이블 2개도 설치했다.

전국 공공도서관은 900여 개. 각종 자격증 입사 시험, 스펙 쌓기로 도서관에서 종일 사는 사람들이 많아 열람실은 항상 부족하다. 대학생 김진석 씨(27)는 “오전 8시에 가도 좌석을 찾지 못해 잠시 자리를 비운 자리를 찾아다니는 ‘메뚜기’ 생활을 한다”며 “카페에서도 공부하지만 커피 값이 만만치 않고 시끄럽다”고 말했다.

Ⅱ 이론적 배경 및 가설

인간행동학(praxeology)으로 보면 누군가의 앞에서 책을 볼 때는 ‘쇼오프(show-off·과시)’ 효과가 나타난다. 읽는 책을 통해 나의 지성을 표현하려는 욕구다. 1980년대 대학생들이 타임지 표지가 보이게 들고 다닌 것과 같은 맥락. 그래도 서점 독서테이블에서 수험서를 펴고 공부하는 이가 있을까? 팍팍한 취업전선을 생각해 가설을 세웠다. “서점 독서테이블에서 장시간 공부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Ⅲ 연구 결과

12일 오전 9시 반. 교보문고 광화문점의 대형 독서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9시 42분경 테이블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구석 자리에 앉아 공무원 수험서와 노트를 펴는 20대 후반 여성도 있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서 테이블이 가득 찼다. 2시까지 기자는 15분 단위로 주변을 돌며 사람들이 읽는 책을 살폈다. 정오 기준으로 54명 중 11명이 ‘해커스 토익’ ‘에듀스 GSAT 삼성직무적성검사’ ‘농협은행 5급 직무능력검사’ ‘경찰학 개론 기출문제’ 등을 펴고 공부했다.

오후 2시에는 73명 중 12명이 토익책을 봤다. 6명은 전산응용 건축제도 기능사 등 자격증 서적을, 4명은 노트북을 꺼내 전공서를 정리했다. 오후 4시까지 살펴본 이용자 분포를 보면 25∼30%가량이 ‘공부족’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시선을 의식해 일반책을 3, 4권 앞에 쌓아 둔 채 공부했다. 텀블러와 필통은 필수.

40%가량은 ‘부동산 상식 50가지’ ‘연봉협상의 기술’ 등 실용서를 읽었다. 독서테이블 이용자의 70%는 살아남는 데 필요한 책을 선택한 셈(표 참조).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문학 같은 비(非)정보형 독서보다는 문제집, 재테크서처럼 정보소비형 독서가 많다”고 설명했다.

책을 통한 지적 과시의 여유는 사라진 것일까? 기자는 오후 2시부터 1시간 동안 독서테이블에 앉아 질 들뢰즈의 철학서를 비롯해 경제 관련 영어 원서를 쌓아 두고 읽으며 주변 반응 살폈다. 사람들은 대부분 옆 사람이 어떤 책을 읽는지에 관심이 없었다. 자리를 옮겨 만화책을 읽었다. 그제야 ‘어떤 놈이길래 이런 데서 만화책을 쌓아 두고 보냐’는 눈빛과 함께 시선이 기자 쪽으로 향했다.

오후 8시 반. 아침에 본 20대 여성이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열공’ 중이었다. ‘서점에는 공부족이 산다’는 사실은 입증됐다. 편안하게 책을 읽자고 설치한 서점 독서테이블에서도 수험서, 자격증 기출문제집을 보며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 많다는 현실이 씁쓸했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대형서점#문화공간#공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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